기도-하나님 설득하는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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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4-09-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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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형편과 사정을 잘 설명하여 도와 줄 마음이 생기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절대 빈곤 상황에서 도움을 구할 때는 불쌍하게 보여야 하고, 투자를 위한 도움 요청에서는 신뢰를 받을만한 합리적 계획을 제시해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도움을 줄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는 면에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진정성과 절박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반드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도와 줄 때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도움을 주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절박함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사랑의 동기에서 마음을 열기보다 명분을 좇아 마음을 엽니다. 그래서 도움의 손길은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보다 말 잘하고 수단이 좋고 명분 있는, 소위 설득력 있는 사람에게 쏠리게 마련입니다.
현대는 도움을 받는 것도 일종의 비즈니스화 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들도 지원을 많이 받으려면 말을 잘하고 사역에 대한 presentation 잘해야 합니다. 교회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선교사를 돕기보다 말 잘 하고 설득력이 뛰어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선교사를 돕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의 극단적 부작용은 수단이 뛰어난 선교사는 부자(?)가 되고 그런 능력이 없는 선교사는 죽을 고생을 다하면서도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와 도움을 주는 일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부작용이 기도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도란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와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마치 하나님을 잘 설득하여 도움을 얻어내려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꾸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기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여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복종하여 산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여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모범을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를 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기도하셨고, 시간이 나면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고, 하루 일과가 끝난 시간에 따로 기도하시기도 하셨고, 큰일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셨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기도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도는 무엇을 구하셨는지 기록이 없어서 기도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에서는 기도의 내용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을 가능하면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셨고,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기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이 평소에 드린 기도도 당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과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것을 구하셨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연장선상에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간청한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물론 기도의 방법과 중요성까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도에 대한 그 가르침을 요약하면 첫째는 친구의 간청. 둘째는 성령님을 주시는 하나님, 셋째는 성령을 구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간청’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인데‘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집’(shameless persistence)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로 기도를 이해하면, 기도란 좀 뻔뻔하게 떼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의 이러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설교나 간증을 통해 강조하기도 하고 심지어 기도의 그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책도 여러 권 나와 있습니다. 기도의 그러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성경이 눅 18:1-8절에 나오는 한 억울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자기의 억울한 원한을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시작하실 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재판장이 처음에는 무시하였지만 과부가 계속해서 찾아와 귀찮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과부의 요청을 해결해주려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그와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떼를 쓰듯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믿기 때문에 떼를 쓰듯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떼를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로만 기도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와 시련 앞에 울고불고 부르짖고 몸부림 치고 소리 지르며 떼를 쓰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기도한 이들이 있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하면서 떼를 썼습니다. 욥 같은 경우도 자기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까지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태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를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식으로 하는 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미주알고주알 다 달라고 기도합니다. 차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차 종류, 색깔, 옵션 등을 구체적으로 구하라고 합니다. 결혼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키, 학벌, 얼굴, 연봉, 취미 등 온갖 것을 다 구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라도 이루어지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고 몇 가지가 덜 이루어지면 기도가 부족하니까 더 기도하면 다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위험은 인간의 뜻과 욕망을 이루려는 데 집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간청’이라는 단어의 뜻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집이라는 의미이지만 그 단어의 뜻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염치 불구하고 떼를 쓰는 것이라고 가르치면 곤란합니다.
한 밤 중에 친구에게 떡을 빌리러 간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의 태도가 정당하고 잘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이 아니라 떡을 빌려 준 집 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려고 한 것은 친구에게 무례하게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무례한 친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들어준 집 주인의 태도인데, 그 집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무례한 친구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친구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들어 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간청 기도가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모두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잘 못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없이 떼를 쓰는 우리의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철없이 떼를 쓰는 기도를 들어주시니까 계속 철없이, 염치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때를 쓰자 라고 하며, 그런 태도를 기도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기도에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는 도움을 받는 것도 일종의 비즈니스화 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들도 지원을 많이 받으려면 말을 잘하고 사역에 대한 presentation 잘해야 합니다. 교회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선교사를 돕기보다 말 잘 하고 설득력이 뛰어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선교사를 돕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의 극단적 부작용은 수단이 뛰어난 선교사는 부자(?)가 되고 그런 능력이 없는 선교사는 죽을 고생을 다하면서도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도움을 구하는 자와 도움을 주는 일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부작용이 기도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도란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와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마치 하나님을 잘 설득하여 도움을 얻어내려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꾸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기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여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복종하여 산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여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모범을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를 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기도하셨고, 시간이 나면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고, 하루 일과가 끝난 시간에 따로 기도하시기도 하셨고, 큰일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셨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기도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도는 무엇을 구하셨는지 기록이 없어서 기도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에서는 기도의 내용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짐을 가능하면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셨고,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기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이 평소에 드린 기도도 당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과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것을 구하셨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연장선상에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 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간청한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물론 기도의 방법과 중요성까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도에 대한 그 가르침을 요약하면 첫째는 친구의 간청. 둘째는 성령님을 주시는 하나님, 셋째는 성령을 구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간청’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인데‘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집’(shameless persistence)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로 기도를 이해하면, 기도란 좀 뻔뻔하게 떼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의 이러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설교나 간증을 통해 강조하기도 하고 심지어 기도의 그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책도 여러 권 나와 있습니다. 기도의 그러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성경이 눅 18:1-8절에 나오는 한 억울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자기의 억울한 원한을 들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시작하실 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재판장이 처음에는 무시하였지만 과부가 계속해서 찾아와 귀찮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과부의 요청을 해결해주려고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그와 같은 측면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떼를 쓰듯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믿기 때문에 떼를 쓰듯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떼를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로만 기도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와 시련 앞에 울고불고 부르짖고 몸부림 치고 소리 지르며 떼를 쓰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기도한 이들이 있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하면서 떼를 썼습니다. 욥 같은 경우도 자기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까지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태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를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식으로 하는 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미주알고주알 다 달라고 기도합니다. 차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차 종류, 색깔, 옵션 등을 구체적으로 구하라고 합니다. 결혼 대상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키, 학벌, 얼굴, 연봉, 취미 등 온갖 것을 다 구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라도 이루어지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고 몇 가지가 덜 이루어지면 기도가 부족하니까 더 기도하면 다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위험은 인간의 뜻과 욕망을 이루려는 데 집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간청’이라는 단어의 뜻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고집이라는 의미이지만 그 단어의 뜻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염치 불구하고 떼를 쓰는 것이라고 가르치면 곤란합니다.
한 밤 중에 친구에게 떡을 빌리러 간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의 태도가 정당하고 잘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이 아니라 떡을 빌려 준 집 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려고 한 것은 친구에게 무례하게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무례한 친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들어준 집 주인의 태도인데, 그 집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무례한 친구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친구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들어 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간청 기도가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모두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잘 못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없이 떼를 쓰는 우리의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철없이 떼를 쓰는 기도를 들어주시니까 계속 철없이, 염치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때를 쓰자 라고 하며, 그런 태도를 기도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기도에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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