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와 그리스도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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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4-08-2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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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요인은 당사자 개인에게 있기도 하고 사회에 있기도 합니다. 개인에게 있는 요인은 개인이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사회적 요인은 제도와 교육과 같은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정부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개인적 요인은 개인이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사회적 요인은 정부가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면 왕따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는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괴롭힘 당하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개인적 문제는 개인이 해결해야 하지만 기독교적 인간관에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사회적 요인은 정부가 해결하도록 노력하지만 환경이 아무리 개선된다고 해도 사람 자체가 악하고 교활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사람이 그것을 악용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악을 행한 환경이 그와 같은 개인적 요인이나 사회적 요인이 전혀 없는 낙원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에게도 정부에게도 이러한 이해와 전제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에 의해서 무시되고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개인적 요인 때문이건 사회적 요인 때문이건, 또는 왕따의 유형이 개인의 약점 때문이거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거나 나아가서는 사회적 정의나 선각자 의식이나 신앙 때문이거나 간에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는 그것이 곧 신앙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왕따의 문제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구약의 예레미야가 오늘날로 말하면 왕따를 당한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왕따를 당한 전형적인 경우임과 동시에 왕따의 문제를 믿음 안에서 극복한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왕따를 당하게 된 요인이 곧 왕따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예레미야의 삶의 태도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관심은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제사를 완벽하게 드리거나 인기를 누리는 리더십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 갈망을 따라 살려다가 죽을 고생을 하고 친구와 주위 모든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진리와 생명에 대한 순전한 열정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려는 일을 백성들에게 사실대로 전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라면 조국과 민족의 내일이 참담합니다. 그 사실이 그에게 있어서는 늘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생명이 위험에 직면한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논리나 합리성이나 경험이나 상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상식과 논리와 합리성과 경험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힘이 약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라고 토로합니다(렘 20:7-8).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논리적으로는 절대 납득도 못하고 항복도 안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이런 표현을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당신께서 저보다 힘이 세시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보다 힘이 세셔서 저를 이기셨기 때문에 저는 죽지 못해 왕따로 삽니다. 이런 정도의 상황이라면 될 대로 되라는 태도를 취할 법 한데 그는 백성들의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마음이 곧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레미야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뜻과 백성들의 생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구 편이냐, 보수냐 진보냐, 야당이냐 여당이냐, 당회냐 제직회냐, 선교냐 교육이냐, 구제냐 사업이냐, 돈이냐 명예냐, 뭐 이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예레미야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입니다. 목회나 선교나 선행이나 비즈니스나 직장생활이나 공부나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진리와 생명에 대한 집중력에서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나름의 업적을 세우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관리하고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여 제사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집례하고 또한 백성의 애국심에도 부응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런 일련의 지도자가 가질 법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요즘 목회자는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욕망과 교인들의 기대로부터 자유 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그의 생명 구원, 그분의 통치에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그의 영혼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곁눈질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예민한 영적 각성으로 정신을 잃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예레미야는 찬양의 이유로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은 여전히 학대를 당하고 제국 바벨론은 침략의 의도를 구체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래하라 찬양하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노래나 찬양이 아니라 금식이나 회개나 기도하라고 외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심한 모욕과 조롱과 왕따를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난의 때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마치 욥과 같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자조와 자학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렘 20:14 이하).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를 노래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은 일상이고 삶 자체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대한 2천년 교회 역사를 통한 해석의 도움으로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예레미야를 맛이 간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심지어 같은 지도자들까지 그렇게 봅니다. 고난 가운데서 여호와를 노래하고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의 신비는 아무나 이해하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긍정의 Yes와 부정의 No인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No는 심판이고 하나님의 Yes는 은혜입니다. 인간의 이해와 합리적 논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이 이중성에 대해 우리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해는 할 수 없고 납득이 안 되어도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No가 아무리 준엄해도 그 No는 하나님의 Yes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Yes가 No보다 강력하고, 복음이 율법보다 우월하며, 은혜가 심판보다, 생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믿음이란 이 사실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이 뿌리가 든든한 사람은 예레미야처럼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여호와를 노래하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노래는 영혼이 만족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찬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지라도 내면의 중심에는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만족은 현실적으로 참기 어려운 고난이 있을수록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 예를 우리는 예레미야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앞뒤 전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여호와를 노래하라거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느닷없이 여호와를 노래하라고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런 특징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 말은 늘 생글생글 웃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짜증나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좌절하고 절망하며 생일을 저주하는 가운데서 역설적이게도 이 내면의 만족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적극적이거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실제로 깊이 깨달아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즉 의로운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실현된 현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괴롭힘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궁극적인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 20:8-10, 13-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개인적 요인 때문이건 사회적 요인 때문이건, 또는 왕따의 유형이 개인의 약점 때문이거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거나 나아가서는 사회적 정의나 선각자 의식이나 신앙 때문이거나 간에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는 그것이 곧 신앙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왕따의 문제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구약의 예레미야가 오늘날로 말하면 왕따를 당한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왕따를 당한 전형적인 경우임과 동시에 왕따의 문제를 믿음 안에서 극복한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왕따를 당하게 된 요인이 곧 왕따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예레미야의 삶의 태도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관심은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제사를 완벽하게 드리거나 인기를 누리는 리더십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 갈망을 따라 살려다가 죽을 고생을 하고 친구와 주위 모든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진리와 생명에 대한 순전한 열정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려는 일을 백성들에게 사실대로 전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라면 조국과 민족의 내일이 참담합니다. 그 사실이 그에게 있어서는 늘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생명이 위험에 직면한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논리나 합리성이나 경험이나 상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상식과 논리와 합리성과 경험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힘이 약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라고 토로합니다(렘 20:7-8).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논리적으로는 절대 납득도 못하고 항복도 안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이런 표현을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당신께서 저보다 힘이 세시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보다 힘이 세셔서 저를 이기셨기 때문에 저는 죽지 못해 왕따로 삽니다. 이런 정도의 상황이라면 될 대로 되라는 태도를 취할 법 한데 그는 백성들의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마음이 곧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레미야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뜻과 백성들의 생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구 편이냐, 보수냐 진보냐, 야당이냐 여당이냐, 당회냐 제직회냐, 선교냐 교육이냐, 구제냐 사업이냐, 돈이냐 명예냐, 뭐 이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예레미야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입니다. 목회나 선교나 선행이나 비즈니스나 직장생활이나 공부나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진리와 생명에 대한 집중력에서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나름의 업적을 세우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관리하고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여 제사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집례하고 또한 백성의 애국심에도 부응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런 일련의 지도자가 가질 법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요즘 목회자는 교회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욕망과 교인들의 기대로부터 자유 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그의 생명 구원, 그분의 통치에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그의 영혼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곁눈질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예민한 영적 각성으로 정신을 잃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예레미야는 찬양의 이유로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은 여전히 학대를 당하고 제국 바벨론은 침략의 의도를 구체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래하라 찬양하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노래나 찬양이 아니라 금식이나 회개나 기도하라고 외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심한 모욕과 조롱과 왕따를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난의 때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마치 욥과 같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자조와 자학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렘 20:14 이하).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를 노래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은 일상이고 삶 자체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대한 2천년 교회 역사를 통한 해석의 도움으로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예레미야를 맛이 간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심지어 같은 지도자들까지 그렇게 봅니다. 고난 가운데서 여호와를 노래하고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의 신비는 아무나 이해하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긍정의 Yes와 부정의 No인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No는 심판이고 하나님의 Yes는 은혜입니다. 인간의 이해와 합리적 논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이 이중성에 대해 우리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해는 할 수 없고 납득이 안 되어도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No가 아무리 준엄해도 그 No는 하나님의 Yes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Yes가 No보다 강력하고, 복음이 율법보다 우월하며, 은혜가 심판보다, 생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믿음이란 이 사실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이 뿌리가 든든한 사람은 예레미야처럼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여호와를 노래하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노래는 영혼이 만족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찬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지라도 내면의 중심에는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만족은 현실적으로 참기 어려운 고난이 있을수록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 예를 우리는 예레미야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앞뒤 전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여호와를 노래하라거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느닷없이 여호와를 노래하라고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런 특징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 말은 늘 생글생글 웃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짜증나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좌절하고 절망하며 생일을 저주하는 가운데서 역설적이게도 이 내면의 만족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적극적이거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실제로 깊이 깨달아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즉 의로운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실현된 현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괴롭힘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궁극적인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 20:8-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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