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와 그리스도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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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4-08-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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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 기관에서 직장인 947명을 대상으로 ‘사내 왕따 여부’를 조사한 결과 29.1%가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직장인 10명 중 3명은 직장 왕따가 자행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왕따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성격 유형 분석에 의하면, 왕따를 당하는 유형 중 1위는 눈치가 없고 답답한 성격을 가진 사람(34.4%)이고, 2위가 말로만 일을 하는 사람(30.8%)이고, 3위는 업무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30.1%), 4위는 조직에 어울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24.6%), 5위는 조직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22.1%), 6위는 잘난 척이 심한 사람(21%), 7위는 동료들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사람(20.3%), 8위는 상사 등에게 심하게 아부하는 사람(17.8%), 9위는 혼자 모든 성과를 독식하려고 하는 사람(15.2%), 10위는 감정 조절을 못하는 사람(13.4%) 등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전문가들은 직장 따돌림이 치열한 사내 경쟁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따돌림은 어느 집단에서나 있을 수 있지만 직장은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곳 중 하나인데, 이곳에서 동료 한 명을 왕따 시킴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회사 직원’이라는 의식은 약해지고 사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남을 누르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 왕따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직장인들이 동료를 왕따 시키는 방법으로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한 사람만 빼고 먹는다든지, 인터넷 대화방에 끼워주지 않는다든지 또는 회의시간이나 차 마실 때 의견을 냈는데 무시하거나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등의 형태로 은근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일들이 쌓여 본인의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조사대상의 70.3%는 이런 왕따 분위기를 알면서 모른 척 방관하고 있다고 답하였으며 8%는 오히려 동참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말린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가 48.1%로 가장 많았고, ‘스스로 처리해야 할 문제라서’라는 대답이 27.3%,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한 대답이 24.5%,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가 19%, ‘말리면 나도 피해 볼 것 같아서’가 17.1%,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가 15.7%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요즘 빈번히 일어나는 살인이나 자살의 요인이 되고 있는 왕따는 성격으로 분석되는 요인에 가치 질서의 붕괴가 치명적 상승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왕따의 대상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어야 할 같은 공동체 내의 동료라는 사실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격 때문에 왕따가 되는 것은 그 요인이 나에게 있어 비교적 덜 억울하지만 가치 질서의 붕괴는 왕따의 요인이 그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있어 억울함과 좌절감이 더 심합니다.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피해자가 임 병장처럼 반응하게 되면 그 피해는 일차적으로 동료들에게,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왕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회적 ‘시한폭탄’인 셈입니다.
제시된 사내 왕따 해결책으로는 선을 긋고, 타인이 터치할 수 없는 개인 업무 역량을 강화하는 것, 미리 피해의식을 갖지 말 것, 기업과 사회적 차원의 도움, 사내 심리상담 시스템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사내 왕따를 규제하는 금지규정을 기업 자체에서 명문화하는 방법들이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었습니다. 왕따는 피해자의 성격상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왕따 사각지대가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왕따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겪으셨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고되었고 또한 실제로 겪어야만 했던 것이 왕따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와 로마 권력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왕따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자들이 당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믿음 자체 때문에 왕따를 당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이나 선지자들에게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도 대표적인 왕따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렘 20:10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여기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라는 표현을 공동번역은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사면초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레미야를 괴롭히던 제사장 바스훌에게 하나님께서 붙여준 별명입니다(렘 20:3).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성전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에게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이름을 바스훌이라 하지 말고 사면초가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한 것을, 바스훌이 아니라 예레미야 네가 바로 사면초가라고 하면서 조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사면초가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겠다며 너도 나도 그를 고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였습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까지 예레미야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를 편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왕따의 경우입니다. 예레미야가 왕따가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과 그를 추종하는 모든 이들과 백성들까지 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 때문입니다. 당시는 바벨론의 유다에 대한 위협이 점점 심해지던 때라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게는 낙담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고 지도자들의 눈에는 자존심 상하는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선지자들이나 설교자들도 상황이 이런 정도로 악화되면 대개 입을 다뭅니다.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니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예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전해도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효과도 없는 일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예민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영적 예민함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습니다(렘 20:9).
우리는 흔히 선지자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고 능력이 얼마나 강하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심약한 선지자도 있을 수 있고 강한 선지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했다거나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선교를 많이 한다거나 많은 돈을 들여 큰 예배당을 짓는다거나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문제라면 예레미야를 괴롭히는 바스훌이 훌륭히 해내고 있습니다. 거짓 예언을 일삼던 바스훌도 이런 면에서는 탁월했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의 총감독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단 총회장이나 인기 있는 초대형교회의 담임 목사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세련되고 인기 있고 리더십도 뛰어났습니다. 성전 관리능력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으로도 가정과 세상에서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참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참 신앙과 반대 되는 것들입니다. 영향력 있는 교계 지도자들이나 큰 교회 목회자 뿐 아니라 작은 교회 목회자나 이름 없는 지도자나 교인들 중에도 참 신앙과 반대되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 안에서는 왕따를 당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기와 명예와 권력과 풍요 같은 것은 왕따를 당하는 것보다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이 참 경건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요 15:18-19 -
전문가들은 직장 따돌림이 치열한 사내 경쟁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따돌림은 어느 집단에서나 있을 수 있지만 직장은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곳 중 하나인데, 이곳에서 동료 한 명을 왕따 시킴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회사 직원’이라는 의식은 약해지고 사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남을 누르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 왕따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직장인들이 동료를 왕따 시키는 방법으로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한 사람만 빼고 먹는다든지, 인터넷 대화방에 끼워주지 않는다든지 또는 회의시간이나 차 마실 때 의견을 냈는데 무시하거나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등의 형태로 은근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일들이 쌓여 본인의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조사대상의 70.3%는 이런 왕따 분위기를 알면서 모른 척 방관하고 있다고 답하였으며 8%는 오히려 동참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말린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가 48.1%로 가장 많았고, ‘스스로 처리해야 할 문제라서’라는 대답이 27.3%,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한 대답이 24.5%,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가 19%, ‘말리면 나도 피해 볼 것 같아서’가 17.1%,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가 15.7%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요즘 빈번히 일어나는 살인이나 자살의 요인이 되고 있는 왕따는 성격으로 분석되는 요인에 가치 질서의 붕괴가 치명적 상승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왕따의 대상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어야 할 같은 공동체 내의 동료라는 사실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격 때문에 왕따가 되는 것은 그 요인이 나에게 있어 비교적 덜 억울하지만 가치 질서의 붕괴는 왕따의 요인이 그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있어 억울함과 좌절감이 더 심합니다.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피해자가 임 병장처럼 반응하게 되면 그 피해는 일차적으로 동료들에게,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왕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회적 ‘시한폭탄’인 셈입니다.
제시된 사내 왕따 해결책으로는 선을 긋고, 타인이 터치할 수 없는 개인 업무 역량을 강화하는 것, 미리 피해의식을 갖지 말 것, 기업과 사회적 차원의 도움, 사내 심리상담 시스템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사내 왕따를 규제하는 금지규정을 기업 자체에서 명문화하는 방법들이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었습니다. 왕따는 피해자의 성격상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왕따 사각지대가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왕따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겪으셨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고되었고 또한 실제로 겪어야만 했던 것이 왕따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와 로마 권력으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왕따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자들이 당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믿음 자체 때문에 왕따를 당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이나 선지자들에게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도 대표적인 왕따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렘 20:10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여기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라는 표현을 공동번역은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사면초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레미야를 괴롭히던 제사장 바스훌에게 하나님께서 붙여준 별명입니다(렘 20:3).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성전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에게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이름을 바스훌이라 하지 말고 사면초가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한 것을, 바스훌이 아니라 예레미야 네가 바로 사면초가라고 하면서 조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사면초가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겠다며 너도 나도 그를 고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였습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까지 예레미야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를 편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왕따의 경우입니다. 예레미야가 왕따가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과 그를 추종하는 모든 이들과 백성들까지 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 때문입니다. 당시는 바벨론의 유다에 대한 위협이 점점 심해지던 때라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게는 낙담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고 지도자들의 눈에는 자존심 상하는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선지자들이나 설교자들도 상황이 이런 정도로 악화되면 대개 입을 다뭅니다.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니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예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전해도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효과도 없는 일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으로 예민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영적 예민함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습니다(렘 20:9).
우리는 흔히 선지자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고 능력이 얼마나 강하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심약한 선지자도 있을 수 있고 강한 선지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했다거나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선교를 많이 한다거나 많은 돈을 들여 큰 예배당을 짓는다거나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문제라면 예레미야를 괴롭히는 바스훌이 훌륭히 해내고 있습니다. 거짓 예언을 일삼던 바스훌도 이런 면에서는 탁월했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의 총감독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단 총회장이나 인기 있는 초대형교회의 담임 목사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세련되고 인기 있고 리더십도 뛰어났습니다. 성전 관리능력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으로도 가정과 세상에서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참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참 신앙과 반대 되는 것들입니다. 영향력 있는 교계 지도자들이나 큰 교회 목회자 뿐 아니라 작은 교회 목회자나 이름 없는 지도자나 교인들 중에도 참 신앙과 반대되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 안에서는 왕따를 당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기와 명예와 권력과 풍요 같은 것은 왕따를 당하는 것보다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이 참 경건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요 15: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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