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가능 한 것을 명령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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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4-08-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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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 3:4-7절).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시고 전해도 그들은 돌이켜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해도 듣지 않을 메시지를 왜 전하라고 하실까요?
소크라테스가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소되어 재판을 앞두고 있을 때 경건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제자 유튀프론(Ευθύφρων)에게 “경건한 것이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이 신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라고 질문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경건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제자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튀프론의 딜레마”인데, 여기서 많은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질문은 “어떤 행위가 옳은 것은 신이 그것을 명령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이 옳기 때문에 신이 명령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신이 명령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을 통해 전해지는 소크라테스의 윤리이론인데, 그 이론을 신명론(Divine Command Theory)이라고 합니다. 이 신명론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살인이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나,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살인이 나쁜가?”이 질문에서 개신교회는 주의주의(voluntarism)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주지주의(intellectualism)로 입장을 달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회의 주지주의는 무엇이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고, 종교개혁자들의 주의주의는 하나님이 금했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 외에 선의 기준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이 선이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만약 하나님이 옳지 않은 것을 하라고 명령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개혁자들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개혁자들의 대답은 하나님이 절대 기준이기 때문에 비록 옳지 않은 것(그럴 리가 없지만)을 명령해도 명령하는 즉시 옳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윤리는 이러한 신관(神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당위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s)라고 합니다. 당위론적 윤리의 반대편에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s)가 있습니다. 목적론적 윤리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지만 당위론적 윤리는 선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40년이라는 광야생활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한 것은 그들에게 그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명령할 때 결과나 목적을 중요시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도 목적이나 결과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과정입니다. 기독교 윤리와 세상 윤리의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윤리를 당위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선하고 옳은 일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다 그것이 선하고 옳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옳은 것에 대한 근거도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나 인간의 유익이나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찾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옳은 이유는 하나님이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의 선의 기준을 전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종교개혁자들은 몹시 싫어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가톨릭 신학자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할 때 가톨릭 신학자들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아리스토텔레스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아직도 죽은 개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자들이 있다고 험한 말을 하였는데, 그 죽은 개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한 일을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나 선이나 사랑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인류 역사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혼란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셨고 우리는 순종하였으며 좋은 결과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결과는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순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무능한 인간이 노력을 했는데 선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순에 대해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은 심는 자의 노력과 정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원리의 작동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삽니다. 우리는 아무리 관계가 좋은 사이라도 의견이 대립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경쟁심과 시기심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싸우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긴장합니다. 그런데 가끔 분명히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싸우려고 할 이유가 충분한데도 화를 내거나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잘 참고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비록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선한 것이 없고 의로운 것이 없어 선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지만 가끔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성인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나 친구가 나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그런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이상합니다. 속물(죄인의 괴수)인 내가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은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변한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작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성령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감사와 찬양으로 밖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롬 11:33 -
소크라테스가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소되어 재판을 앞두고 있을 때 경건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제자 유튀프론(Ευθύφρων)에게 “경건한 것이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이 신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라고 질문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경건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제자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튀프론의 딜레마”인데, 여기서 많은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질문은 “어떤 행위가 옳은 것은 신이 그것을 명령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이 옳기 때문에 신이 명령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신이 명령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을 통해 전해지는 소크라테스의 윤리이론인데, 그 이론을 신명론(Divine Command Theory)이라고 합니다. 이 신명론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살인이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나,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살인이 나쁜가?”이 질문에서 개신교회는 주의주의(voluntarism)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주지주의(intellectualism)로 입장을 달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회의 주지주의는 무엇이 나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고, 종교개혁자들의 주의주의는 하나님이 금했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 외에 선의 기준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이 선이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악이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만약 하나님이 옳지 않은 것을 하라고 명령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개혁자들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그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개혁자들의 대답은 하나님이 절대 기준이기 때문에 비록 옳지 않은 것(그럴 리가 없지만)을 명령해도 명령하는 즉시 옳은 것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윤리는 이러한 신관(神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당위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s)라고 합니다. 당위론적 윤리의 반대편에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s)가 있습니다. 목적론적 윤리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지만 당위론적 윤리는 선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라면 40년이라는 광야생활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한 것은 그들에게 그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명령할 때 결과나 목적을 중요시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도 목적이나 결과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과정입니다. 기독교 윤리와 세상 윤리의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윤리를 당위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선하고 옳은 일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다 그것이 선하고 옳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고 옳은 것에 대한 근거도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나 인간의 유익이나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찾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옳은 이유는 하나님이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의 선의 기준을 전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종교개혁자들은 몹시 싫어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가톨릭 신학자들은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할 때 가톨릭 신학자들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아리스토텔레스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아직도 죽은 개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자들이 있다고 험한 말을 하였는데, 그 죽은 개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한 일을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나 선이나 사랑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인류 역사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혼란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셨고 우리는 순종하였으며 좋은 결과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결과는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러한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모순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무능한 인간이 노력을 했는데 선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순에 대해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은 심는 자의 노력과 정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원리의 작동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삽니다. 우리는 아무리 관계가 좋은 사이라도 의견이 대립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경쟁심과 시기심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싸우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긴장합니다. 그런데 가끔 분명히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싸우려고 할 이유가 충분한데도 화를 내거나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잘 참고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비록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선한 것이 없고 의로운 것이 없어 선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지만 가끔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성인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나 친구가 나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그런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이상합니다. 속물(죄인의 괴수)인 내가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은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변한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과 생각이 그렇게 작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성령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감사와 찬양으로 밖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롬 1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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