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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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4-07-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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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선지자들은 썩어빠진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몹시 힘들어하였던 반면 거짓 선지자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이러한 대조는 두 종류의 현대 그리스도인과도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악이 준동(蠢動)하는 것은 세상과 교회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앞선 사람들을 비판하고 제도와 환경을 탓하는 것은 쉽지만 썩어빠진 세상과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영혼까지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탄원하는 믿음으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믿음 없는 자의 기우(杞憂)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기우는 엘리야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가 자기 혼자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두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세상과 함께 썩지 않으려고 영혼까지 괴로워하며 몸부림 치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교회가 함께 썩어가고 있어도 내 몸에 병이 든 것처럼 아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악의 준동을 별 생각 없이 바라봅니다. 세상이란 본래 그런 거라 생각하고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런데 참 선지자들은 왜 그렇게 고민하고 힘들어 하고 절망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하기까지 하였을까요? 썩어빠진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였지만 그 썩어빠진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까지도 납득할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그런 현실을 몸과 영혼으로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그들의 몸과 영혼을 피곤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무능력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C.S 루이스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현실에 대해 정직한 사람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악의 준동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속상해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당황해 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실망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는 고유한 당신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악이 준동하는 썩어빠진 세상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개입방법에 불평하며 탄원하다가 하나님의 묵시를 받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뜻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와 뜻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거짓되지 않고 정의를 무시하지도 않고 썩어빠진 세상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백성과 지도자에 대해 무관심 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영적 능력이고 경건입니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탄원하는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신약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후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것도 표현은 다르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도 믿음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중요한 만큼 오해할 경우 부작용도 치명적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오해를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믿음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뒤틀어지고 맙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마다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것은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나 지혜나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진정성 있는 신자일수록 모든 문제를 ‘믿음’과 결부시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따지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내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정당한 질문을 해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에게 습관적으로 구타당하는 아내들에게 믿음으로 무조건 참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이렇게 적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한 때 교회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도 믿음이 없는 행위라고 단죄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자연과학까지 믿음으로 재단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믿음이 종종 광신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 고백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간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를 쉽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에 이르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입니다. 과정이 생략된 결론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늘 신앙을 고백하지만 고백하는 신앙내용에 대한 치열한 부대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요한 신앙고백이라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주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은 것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돈이 내 손에 넉넉히 들어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돈이 그렇게 좋은 것은 그 돈으로 넉넉하고 쾌적한 생활환경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만 있어서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가족이 있어야 하고 친구도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구가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가족과 친구와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도 받아야 합니다. 돈과 가족과 친구가 있고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받아도 또한 건강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요소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거나 부족할 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들만 어느 정도 확보되면 행복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확보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종종 쉽게 무시됩니다. 돈과 가족과 친구와 사회적 인정과 존경 같은 것을 얻는 방법과 과정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수단이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심지어 교회까지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 불법과 거짓과 비윤리적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국회와 행정부가 날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비난합니다. 지도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국민이 없이 정치인이 있을 수 없고 지도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들 중에서 나왔습니다. 국민이 선출하고 선택하고 세운 자들입니다. 물론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지도자는 국민보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가치관이 더 나아야 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의식 수준은 형편없는데 지도자는 고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국민의 의식 수준이나 가치관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다수 국민의 뜻이 마치 신성불가침 절대적 기준처럼 되어 있습니다. 다수의 국민이 요구하면 잘못된 것도 옳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치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하나님을 잘 믿어 복 받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의 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의인의 반대편에 있는 자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아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의인과 반대편에 있는 자가 어떻게 사는 지를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하박국은 준동하는 악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별로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악의 준동을 인식하지만 대개는 귀찮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또는 공연히 나섰다가 나만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침묵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걸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하고 호소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악이 준동하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박국은 악의 준동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방법이 정당하냐고 하나님께 따지듯 탄원하였습니다. 의인이 나서서 악을 심판하면 모르겠지만 더 나쁜 악인이 나타나서 덜 악한, 또는 의인을 심판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따지듯이 탄원한 후 하나님께서 무슨 대답을 하실지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악한 자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결코 자기가 구가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얻어도 그것으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인의 삶의 반대편에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이 놓여 있습니다. 의인이 아닌 자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질만능을 구가하는 자본주의의 약점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여 사회나 교회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에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를 정당화 하면서 ‘믿음’을 ‘하면 된다’는 식의 믿음만능주의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는 마음의 평안보다는 풍요와 몸의 안식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얻으면 승자의 교만으로 약자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자기가 불의한 방식으로 얻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불의한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치관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 교회와 국민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도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를 옳고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독일국민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히틀러 시대의 독일인보다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제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독일인들은 아버지 세대의 죄를 회개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들도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살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교만한 자의 꿈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런 것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생명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과는 달리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교만이나 패배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생명과 반대인 죽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영적 촉수를 맞추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때에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승리가 성취되기 전까지는 어둠의 시간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어두움의 시기를 지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의 어두움의 때를 견딜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자신의 기대에 조금만 빗나가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반대로 기대하던 일들이 성취되고 조금만 좋아져도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좋고 우쭐해 합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삶을 경험합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었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도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 내셨습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그분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 2:20 -
이 시대에도 세상과 함께 썩지 않으려고 영혼까지 괴로워하며 몸부림 치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교회가 함께 썩어가고 있어도 내 몸에 병이 든 것처럼 아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악의 준동을 별 생각 없이 바라봅니다. 세상이란 본래 그런 거라 생각하고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런데 참 선지자들은 왜 그렇게 고민하고 힘들어 하고 절망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하기까지 하였을까요? 썩어빠진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였지만 그 썩어빠진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까지도 납득할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그런 현실을 몸과 영혼으로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그들의 몸과 영혼을 피곤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세상을 그대로 놓아두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무능력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C.S 루이스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현실에 대해 정직한 사람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악의 준동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속상해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당황해 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실망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는 고유한 당신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악이 준동하는 썩어빠진 세상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개입방법에 불평하며 탄원하다가 하나님의 묵시를 받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뜻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와 뜻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거짓되지 않고 정의를 무시하지도 않고 썩어빠진 세상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백성과 지도자에 대해 무관심 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영적 능력이고 경건입니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탄원하는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신약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후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것도 표현은 다르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도 믿음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중요한 만큼 오해할 경우 부작용도 치명적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오해를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믿음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뒤틀어지고 맙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마다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것은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나 지혜나 경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진정성 있는 신자일수록 모든 문제를 ‘믿음’과 결부시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따지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내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정당한 질문을 해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에게 습관적으로 구타당하는 아내들에게 믿음으로 무조건 참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이렇게 적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한 때 교회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도 믿음이 없는 행위라고 단죄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자연과학까지 믿음으로 재단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믿음이 종종 광신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 고백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간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를 쉽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에 이르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입니다. 과정이 생략된 결론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늘 신앙을 고백하지만 고백하는 신앙내용에 대한 치열한 부대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요한 신앙고백이라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주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의 삶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은 것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돈이 내 손에 넉넉히 들어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돈이 그렇게 좋은 것은 그 돈으로 넉넉하고 쾌적한 생활환경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만 있어서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가족이 있어야 하고 친구도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구가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가족과 친구와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도 받아야 합니다. 돈과 가족과 친구가 있고 사회적 인정과 존경을 받아도 또한 건강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요소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거나 부족할 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들만 어느 정도 확보되면 행복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확보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종종 쉽게 무시됩니다. 돈과 가족과 친구와 사회적 인정과 존경 같은 것을 얻는 방법과 과정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수단이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심지어 교회까지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 불법과 거짓과 비윤리적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국회와 행정부가 날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비난합니다. 지도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국민이 없이 정치인이 있을 수 없고 지도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들 중에서 나왔습니다. 국민이 선출하고 선택하고 세운 자들입니다. 물론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지도자는 국민보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가치관이 더 나아야 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의식 수준은 형편없는데 지도자는 고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국민의 의식 수준이나 가치관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다수 국민의 뜻이 마치 신성불가침 절대적 기준처럼 되어 있습니다. 다수의 국민이 요구하면 잘못된 것도 옳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치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하나님을 잘 믿어 복 받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의 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의인의 반대편에 있는 자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아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의인과 반대편에 있는 자가 어떻게 사는 지를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하박국은 준동하는 악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별로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악의 준동을 인식하지만 대개는 귀찮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또는 공연히 나섰다가 나만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침묵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걸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하고 호소합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악이 준동하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박국은 악의 준동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방법이 정당하냐고 하나님께 따지듯 탄원하였습니다. 의인이 나서서 악을 심판하면 모르겠지만 더 나쁜 악인이 나타나서 덜 악한, 또는 의인을 심판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따지듯이 탄원한 후 하나님께서 무슨 대답을 하실지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악한 자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결코 자기가 구가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얻어도 그것으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인의 삶의 반대편에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이 놓여 있습니다. 의인이 아닌 자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질만능을 구가하는 자본주의의 약점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여 사회나 교회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에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를 정당화 하면서 ‘믿음’을 ‘하면 된다’는 식의 믿음만능주의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는 마음의 평안보다는 풍요와 몸의 안식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얻으면 승자의 교만으로 약자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자기가 불의한 방식으로 얻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불의한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치관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 교회와 국민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도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주의를 옳고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독일국민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히틀러 시대의 독일인보다 집단이기주의와 성장제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독일인들은 아버지 세대의 죄를 회개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들도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살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교만한 자의 꿈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런 것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생명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과는 달리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교만이나 패배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생명과 반대인 죽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영적 촉수를 맞추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때에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승리가 성취되기 전까지는 어둠의 시간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어두움의 시기를 지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의 어두움의 때를 견딜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자신의 기대에 조금만 빗나가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반대로 기대하던 일들이 성취되고 조금만 좋아져도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좋고 우쭐해 합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삶을 경험합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었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면서도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 내셨습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그분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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