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하는 새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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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4-04-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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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소개 하였습니다. 저자는 그 책을 통해 생명현상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 책을 발표한 이래 수많은 학자들이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노벨상을 받았지만 생명은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명현상이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는 것은 생명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현상을 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믿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숨을 쉬어야 살아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생명에 대한 현상적 이해를 넘어 생물학적 호흡을 하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성경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도 있고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차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죽었지만 성경은 지금도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호흡하지 않고 사는 방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없습니다. 부활생명,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철폐되었습니다.
새 생명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생명의 특징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지향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새 생명은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작동하지 않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성경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설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제시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에 대하여는 단 번에 죽으심이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10). 그를 믿는 신자들도 예수님처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여길 지어다.”라는 표현은 사실과 현실이 다름을 전제한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들이지만 그 사실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확신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실감이 안 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실감이 안 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실감이 안 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감이 안 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들이지만 실감이 안 납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길 지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실감이 안 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들입니다. 실감이 안 나도 그렇다고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고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이라고 하였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 자요 죄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표현이 걸맞은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에 힘쓰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보다 이기적인 일에 혼신의 힘을 쏟으며 삽니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는 살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가 눕기 전에 발로 또는 입으로 열심히 누울 자리를 만듭니다. 사람이 볼 때는 별 게 아니지만 자기 딴에는 자장 좋은 누울 자리를 만들어서 눕습니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자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지향하는 목적으로 활동한다고 합니다. 동식물뿐 아니라 미생물이나 세포까지도 가장 편한 상태를 지향하여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제시한 이론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1941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했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전담하는 석좌교수 직을 맡았으며, 1987년에 왕립문화학회상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진화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은 이기적으로 태어났으며, 선택의 기본 단위, 즉 이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라는 것입니다. 본래 세상은 안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최초의 자연 선택은 안정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정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이론이 그렇지만 그의 이론도 나름대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으로 사람의 생명현상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즉 사람이 행하는 모든 활동도 자기에게 가장 편한 상태를 만들려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교육활동, 경제활동, 문화예술 활동, 취미활동, 건강관리 등 모든 활동이 자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보다는 차원과 수준이 높아서 자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물리적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문화 예술적인 차원을 추구합니다. 나아가서는 사람은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적인 차원에까지 만족해야 진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편하게 살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비즈니스나 직장생활 등 모든 인간의 노력은 편한 삶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식까지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편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포 하나에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까지 모든 생명체는 편안한 상태를 위한 이기적 노력으로 진화하며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한 과학자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비인격적인 세포나 유전자를 이기적이라고 의인화 한 것이나 무신론적 전제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론이지만 나름대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 생명현상을 상당할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론이 설득력을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모든 부모가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편안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바라듯이 하나님께서도 모든 그의 자녀가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도 주시지만 그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애 3:33).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편안한 삶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이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요즘 기독교가 평안과 형통만이 복인 것처럼 전하지만 예수 잘 믿는다고 평안하고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고 우리의 기대도 그렇지만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것과 형통과 평안한 삶이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불행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즉 한 평생 신앙생활을 성실히 했고, 자녀들도 믿음으로 잘 길렀고, 비즈니스도 나름대로 성공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노후를 여유 있게 즐기며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기 암 선고를 받거나, 교통사고를 당하여 장애자가 되거나, 황혼 이혼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악하게 살지 않고 바르게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실까요?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고난은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이런 체험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동일합니다(시 119:69,7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무조건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도 고난과 불행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고난은 무조건 피하고 저돌적으로 형통만을 추구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난은 피하고 싶고 형통을 바라지만 그런 것으로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이 많으면 믿음 생활을 잘해서 그렇다고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 생활을 잘못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하나님께서 피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감당할만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일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지혜나 노하우가 아니라 고난을 대면하는 영적 능력입니다. 고난은 피하는 게 아니라 맞서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기적인 특징 때문에 인간에게 고난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를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였습니다. 이사야의 경우 극심한 고통과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말씀 사역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대우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 경험을 깊게 해 주니까 유익하고 새 생명은 본성적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능력을 키워주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냐” 사 50:8-9
그러나 우리는 생명현상을 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믿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숨을 쉬어야 살아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생명에 대한 현상적 이해를 넘어 생물학적 호흡을 하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성경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도 있고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차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죽었지만 성경은 지금도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호흡하지 않고 사는 방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없습니다. 부활생명,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철폐되었습니다.
새 생명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생명의 특징은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지향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새 생명은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작동하지 않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성경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설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제시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에 대하여는 단 번에 죽으심이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10). 그를 믿는 신자들도 예수님처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여길 지어다.”라는 표현은 사실과 현실이 다름을 전제한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들이지만 그 사실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확신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실감이 안 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실감이 안 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실감이 안 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감이 안 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들이지만 실감이 안 납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길 지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실감이 안 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들입니다. 실감이 안 나도 그렇다고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고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이라고 하였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 자요 죄에 대하여는 산 자라는 표현이 걸맞은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에 힘쓰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보다 이기적인 일에 혼신의 힘을 쏟으며 삽니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는 살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가 눕기 전에 발로 또는 입으로 열심히 누울 자리를 만듭니다. 사람이 볼 때는 별 게 아니지만 자기 딴에는 자장 좋은 누울 자리를 만들어서 눕습니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자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지향하는 목적으로 활동한다고 합니다. 동식물뿐 아니라 미생물이나 세포까지도 가장 편한 상태를 지향하여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제시한 이론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1941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했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전담하는 석좌교수 직을 맡았으며, 1987년에 왕립문화학회상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진화야 말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은 이기적으로 태어났으며, 선택의 기본 단위, 즉 이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라는 것입니다. 본래 세상은 안정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최초의 자연 선택은 안정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정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이론이 그렇지만 그의 이론도 나름대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론으로 사람의 생명현상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즉 사람이 행하는 모든 활동도 자기에게 가장 편한 상태를 만들려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교육활동, 경제활동, 문화예술 활동, 취미활동, 건강관리 등 모든 활동이 자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보다는 차원과 수준이 높아서 자기에게 가장 좋은 상태를 물리적인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심리적이고 정신적이고 문화 예술적인 차원을 추구합니다. 나아가서는 사람은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적인 차원에까지 만족해야 진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편하게 살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비즈니스나 직장생활 등 모든 인간의 노력은 편한 삶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식까지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재물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편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포 하나에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까지 모든 생명체는 편안한 상태를 위한 이기적 노력으로 진화하며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한 과학자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비인격적인 세포나 유전자를 이기적이라고 의인화 한 것이나 무신론적 전제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론이지만 나름대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 생명현상을 상당할 정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론이 설득력을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모든 부모가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편안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바라듯이 하나님께서도 모든 그의 자녀가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도 주시지만 그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애 3:33).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편안한 삶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이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요즘 기독교가 평안과 형통만이 복인 것처럼 전하지만 예수 잘 믿는다고 평안하고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고 우리의 기대도 그렇지만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것과 형통과 평안한 삶이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불행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즉 한 평생 신앙생활을 성실히 했고, 자녀들도 믿음으로 잘 길렀고, 비즈니스도 나름대로 성공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노후를 여유 있게 즐기며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기 암 선고를 받거나, 교통사고를 당하여 장애자가 되거나, 황혼 이혼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악하게 살지 않고 바르게 살았는데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그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실까요?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고난은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이런 체험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동일합니다(시 119:69,7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무조건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도 고난과 불행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적으로 고난은 무조건 피하고 저돌적으로 형통만을 추구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누구나 고난은 피하고 싶고 형통을 바라지만 그런 것으로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일이 많으면 믿음 생활을 잘해서 그렇다고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 생활을 잘못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하나님께서 피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감당할만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일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지혜나 노하우가 아니라 고난을 대면하는 영적 능력입니다. 고난은 피하는 게 아니라 맞서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기적인 특징 때문에 인간에게 고난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를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였습니다. 이사야의 경우 극심한 고통과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말씀 사역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와 대우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 경험을 깊게 해 주니까 유익하고 새 생명은 본성적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능력을 키워주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냐” 사 5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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