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은사는 일반은혜와 조화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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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4-02-2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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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가 배임 및 탈세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억 원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죄목은 주식거래로 교회에 131억 원의 피해를 입혔다는 것과 35억 원의 세금을 포탈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목사는 모든 혐의를 일체 부인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의 주장이 옳다면 사법부가 잘못한 것이고 사법부의 판단이 옳다면 그 목사는 죄인인데, 그 교단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지가 궁금합니다. 그 목사가 억울하다고 항소를 하여 무죄를 증명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능력 있고 신령한 은사를 가진 목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교인이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번 선고에서 그를 불구속한 것은 사회 복지에 기여한 공을 참작했다고 하였습니다. 사회 법정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병 고치는 은사와 신령한 능력들도 하나님의 통치 수단이지만 정의와 윤리와 질서도 하나님의 통치 수단입니다. 바른 복음 안에서는 이 둘이 통일성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단의 가르침에는 이 둘의 통일성이 없습니다. 정의나 윤리나 질서 같은 것은 무시해도 치유의 은사나 신령한 은사가 있으면 문제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초대 교회의 문제가 현대 교회 안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만 너무 그럴 듯해서 교단도 노회도 교인들도 문제를 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곳 미국 교포교회를 비롯해서 한국 교회 안에 그 목사 같은 목사가 상당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설교 잘 하고, 병 고치는 은사와 신령한 능력을 행하면서 동시에 배임 횡령 간음 사기 등 온갖 죄를 짓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는 징후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탈세, 배임 및 횡령, 거짓말, 간음, 사기, 권모술수 같은 것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문제를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배임, 사기, 간음, 횡령, 거짓말, 권모술수 등 온갖 짓을 다하면서도 여전히 존경 받는 목사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절대 자기가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것을 믿음의 담대함으로 생각합니다. 권모와 술수를 은사와 능력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가 많겠지만 지도자와 함께 교인 대다수가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교회가 적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사려 깊게 분별해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나 경건이 일반은혜와 조화되느냐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을 고치고 신령한 체험과 능력을 행한다고 하십시다. 그것이 바른 것인지 가짜인지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한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깊고 신비로운 지식과 신령한 은사가 법과 정의와 윤리와 사회질서와 조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령한 은사나 능력을 가진 자가 법과 정의와 윤리와 질서를 무시하거나 파괴한다면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판정된 이단들에게는 이런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일반 목회자들에게는 경건이나 능력으로 위장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심이 가는 조짐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신비로운 내적 체험으로 깨달아지고 전수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까지 은혜의 복음과 성경 계시의 권위보다 자신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설교 시간에 자기가 기도했더니 어떤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 듣는 교인들은 그런 설교자를 신령하고 능력 있는 설교자로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지만 특히 한국교회에는 신학무용론이 팽배합니다. 목회자들 중에 공공연하게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런 것들은 다 이원론의 영지주의적 영향입니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전도에는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유대인과 헬라 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마술로 생업을 삼던 이들도 자기들의 책을 불사르고, 우상 장수들이 생업의 위협을 느끼고 바울을 제거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킬 만큼 복음의 영향력은 대단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성령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여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면서 교회를 지키게 하였는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서‘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신화는 헬라 철학을 지칭하는 것이고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유대의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가르침이 기독교 복음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다가 자기들의 주장을 첨가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초대교회의 위험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바른 복음에다 이런저런 것들을 섞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당시 위경이라는 가짜 성경이 돌아다녔는데, 위경에 의하면 천사도 할례를 받는다고 하고, 아담도 양성(兩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또 아담과 하와가 결혼한 것 자체가 원죄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자기들은 고상한 왕족의 형통을 타고 났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짜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가짜 계시록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그런 것들을 혼합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거짓 가르침을 쉽게 거부하거나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 해석도 자기들의 주장에 맞게 고쳤습니다. 허탄한 말과 신화 그리고 소위 신비한 지식을 지닌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요한도 그의 서신에서 지적하였듯이, 참된 복음은 사랑 안에서 교회를 세우지만 거짓 지식은 믿음과 행동 사이에 통일성이 없습니다. 복음의 참 지식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왜곡된 복음과 거짓 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파괴합니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거짓 가르침의 잘 못 중 중대한 오류는 ‘은혜’와 ‘자연’ 사이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창조물 자체가 악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 후에도 창조물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물들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영혼은 고귀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연 질서까지도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결혼을 폄하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가톨릭에서 사제가 결혼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해에서 기인한 제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 4:4)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아직도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많고, 결혼하면 안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고상한 것으로 알고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2천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초대교회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던 교훈을 따라 혼인을 패하고 음식을 금하기도 합니다. 이단이나 거짓 교사의 정체는 눈에 확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단이나 거짓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멋있게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나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그런 것 하는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의와 질서와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보다 신령한 은사와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이 더 경건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해서 다스려 지고 있습니다. 그 질서 중에는 자연 질서와 사회질서가 있습니다. 이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의 수단입니다. 정치, 경제, 학문, 예술, 과학, 문화, 제도 등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귀한 선물입니다. 정의와 질서와 윤리 같은 것은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특별 은혜인 구원과 일반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단과 거짓 가르침 때문입니다. 일반 은혜를 무시하는 데도 너무도 신령하고 경건하게 보이고 능력 있게 보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가리킵니다. 그 구원의 섭리는 특별 은혜뿐 아니라 일반 은혜를 다 포괄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 롬 2:21-24 -
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능력 있고 신령한 은사를 가진 목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교인이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번 선고에서 그를 불구속한 것은 사회 복지에 기여한 공을 참작했다고 하였습니다. 사회 법정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병 고치는 은사와 신령한 능력들도 하나님의 통치 수단이지만 정의와 윤리와 질서도 하나님의 통치 수단입니다. 바른 복음 안에서는 이 둘이 통일성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단의 가르침에는 이 둘의 통일성이 없습니다. 정의나 윤리나 질서 같은 것은 무시해도 치유의 은사나 신령한 은사가 있으면 문제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초대 교회의 문제가 현대 교회 안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만 너무 그럴 듯해서 교단도 노회도 교인들도 문제를 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곳 미국 교포교회를 비롯해서 한국 교회 안에 그 목사 같은 목사가 상당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설교 잘 하고, 병 고치는 은사와 신령한 능력을 행하면서 동시에 배임 횡령 간음 사기 등 온갖 죄를 짓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는 징후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탈세, 배임 및 횡령, 거짓말, 간음, 사기, 권모술수 같은 것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문제를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배임, 사기, 간음, 횡령, 거짓말, 권모술수 등 온갖 짓을 다하면서도 여전히 존경 받는 목사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절대 자기가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것을 믿음의 담대함으로 생각합니다. 권모와 술수를 은사와 능력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가 많겠지만 지도자와 함께 교인 대다수가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교회가 적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사려 깊게 분별해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나 경건이 일반은혜와 조화되느냐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을 고치고 신령한 체험과 능력을 행한다고 하십시다. 그것이 바른 것인지 가짜인지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한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깊고 신비로운 지식과 신령한 은사가 법과 정의와 윤리와 사회질서와 조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령한 은사나 능력을 가진 자가 법과 정의와 윤리와 질서를 무시하거나 파괴한다면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판정된 이단들에게는 이런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일반 목회자들에게는 경건이나 능력으로 위장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심이 가는 조짐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신비로운 내적 체험으로 깨달아지고 전수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까지 은혜의 복음과 성경 계시의 권위보다 자신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설교 시간에 자기가 기도했더니 어떤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 듣는 교인들은 그런 설교자를 신령하고 능력 있는 설교자로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지만 특히 한국교회에는 신학무용론이 팽배합니다. 목회자들 중에 공공연하게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이런 것들은 다 이원론의 영지주의적 영향입니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전도에는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유대인과 헬라 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마술로 생업을 삼던 이들도 자기들의 책을 불사르고, 우상 장수들이 생업의 위협을 느끼고 바울을 제거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킬 만큼 복음의 영향력은 대단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성령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여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면서 교회를 지키게 하였는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서‘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신화는 헬라 철학을 지칭하는 것이고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유대의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 가르침이 기독교 복음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다가 자기들의 주장을 첨가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초대교회의 위험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바른 복음에다 이런저런 것들을 섞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당시 위경이라는 가짜 성경이 돌아다녔는데, 위경에 의하면 천사도 할례를 받는다고 하고, 아담도 양성(兩性)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또 아담과 하와가 결혼한 것 자체가 원죄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자기들은 고상한 왕족의 형통을 타고 났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짜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가짜 계시록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그런 것들을 혼합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거짓 가르침을 쉽게 거부하거나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 해석도 자기들의 주장에 맞게 고쳤습니다. 허탄한 말과 신화 그리고 소위 신비한 지식을 지닌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요한도 그의 서신에서 지적하였듯이, 참된 복음은 사랑 안에서 교회를 세우지만 거짓 지식은 믿음과 행동 사이에 통일성이 없습니다. 복음의 참 지식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왜곡된 복음과 거짓 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파괴합니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거짓 가르침의 잘 못 중 중대한 오류는 ‘은혜’와 ‘자연’ 사이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창조물 자체가 악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 후에도 창조물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물들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영혼은 고귀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연 질서까지도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결혼을 폄하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가톨릭에서 사제가 결혼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해에서 기인한 제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 4:4)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 아직도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많고, 결혼하면 안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고상한 것으로 알고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가 2천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초대교회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던 교훈을 따라 혼인을 패하고 음식을 금하기도 합니다. 이단이나 거짓 교사의 정체는 눈에 확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단이나 거짓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멋있게 보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고기나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그런 것 하는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의와 질서와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보다 신령한 은사와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이 더 경건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의해서 다스려 지고 있습니다. 그 질서 중에는 자연 질서와 사회질서가 있습니다. 이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의 수단입니다. 정치, 경제, 학문, 예술, 과학, 문화, 제도 등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귀한 선물입니다. 정의와 질서와 윤리 같은 것은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특별 은혜인 구원과 일반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단과 거짓 가르침 때문입니다. 일반 은혜를 무시하는 데도 너무도 신령하고 경건하게 보이고 능력 있게 보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가리킵니다. 그 구원의 섭리는 특별 은혜뿐 아니라 일반 은혜를 다 포괄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 롬 2:2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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