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됨의 기회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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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4-02-1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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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용어 중에 기회비용(機會費用, Opportunity Cos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하게 되는 것의 가치를 기회비용이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어떤 기회를 사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회란 이익을 말하고 기회비용이란 그 값인 셈입니다. 이 개념은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그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비저(Friedrich von Wieser)입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씨는 월 3,000불을 받는 회사원입니다. 그의 꿈은 개인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회를 찾다가 지금은 비즈니스를 준비 중입니다. 대강 계산을 해보니까, 1년 동안 가게 개설과 운영에 소요되는 금액은 10만 불이고, 예상 되는 연 수입은 10만 3천불입니다. 그러니까 비즈니스를 하게 되면 연 3천불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길동씨가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비즈니스를 할 경우 기회비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명시적 비용(가게 개설에 투입하는 비용) 10만 불, 암묵적 비용(직장을 계속 다녔을 때 얻게 될 수입) 3만 6천불, 이 때 기회비용은 명시적 비용과 암묵적 비용을 합한 13만 6천불입니다. 이 경우 길동씨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직장 생활 하는 것보다 연 3만 3천불을 손해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곧 이익을 낼 수 있다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큰 것입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거나 전망이 좋지 않은 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오늘날처럼 전문적인 경제학자의 경기 예측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위험부담이 더욱 큽니다.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은 단순이 경제적 비용만 계산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비즈니스 능력과 경험 같은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 것에 대한 합리적 계산 없이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길동씨가 이런 것을 무시하고 비즈니스를 시작했다가 실패를 하니까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합니다. “길동씨가 사업하다가 쫄딱 망했다며? 처음부터 무리한다고 생각했어. 자금도 부족하고 능력도 경험도 없으면서 바보같이 왜 비즈니스를 해...”
예수님께서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과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예를 들어 제자의 길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비즈니스나 전쟁이나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하듯이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기회비용을 계산해보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기회비용이란 인간의 능력이나 자격으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의 기회비용을 계산해 보지도 않고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 온 사람들을 단념시켜 돌려보내셨습니다(cf. 눅 9:57-62, 마 8:19-22). 제자 됨의 기회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마태보다 제자 됨의 기회비용에 대해 강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태는 부모나 자녀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마 10:37)고 하였지만 누가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가족을 미워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의 뜻은 제자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이 아니라 제자 된 자가 삶으로 감당해야 될 기회비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그 기회비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소유의 포기, 둘째, 고난 감수, 셋째, 목숨 포기입니다. 이 기회비용의 세 가지를 하나로 설명한 것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기회비용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뜻은 100% 성공과 이익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공과 이익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과 기대가 주님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민족 독립 혁명의 기운을 감지하고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도덕적인 교훈에 감동받고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사회개혁을 꿈꾸며 찾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도 같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바라고 찾아 온 자들은 얼마 있지 않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이 예측은 그대로 적중합니다. 군중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는 몇 명의 여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예수님께 열광하며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자 됨의 기회비용을 계산해 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동기에만 도취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병고치고, 부자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형통 축복 이런 것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의 목적이 빗나가면 언제든지 주님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런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기 때문에 제자 됨의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와 꿈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것까지 버리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돈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사회적 명예나 이념이기도 하고 목숨이기도 합니다.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제자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소유 지향적입니다. 하지만 제자의 길은 그 반대로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길에서 모든 것을 버린 자가 여전히 소유 지향적으로 사는 것을 미리 막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도구요 조건들입니다. 따라서 소유 자체를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소유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늘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시장에서, 길거리에서, 호숫가에서, 성전 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이 예수님 일행을 먹고 마시기를 탐하고 수준 낮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게 가족 관계를 해체하라는 말씀이 아니었듯이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것도 소유 자체를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은 소유 지향적 삶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도 계속 소유의 길을 가려는 것이라면 길을 잘 못 잡은 것입니다. 마음 수련이나 고상한 인격을 쌓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인민 생활이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면 그것도 길을 잘 못 든 것입니다. 그런 요소들이 교회 안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제자 됨의 본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에만 기대를 걸고 제자 됨의 차원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실망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고 예수님을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실망하게 될 사람이라면 미리 실망하는 게 났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예수님께만 있습니다(요 6:58).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어렵다고 불평했습니다. 어렵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고,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못해서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적으로 무엇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로만 아는 게 아니라 그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수혜자로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수혜자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렵다고 했던 이들은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서 어려웠기도 했겠지만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확신과 이해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에 제자 됨의 기회비용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자 그럴 수는 없다고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과 소유 지향적 길에서 갈등하는 이유는 소유의 길도 너무 괜찮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교양 있게 살아가는 모든 삶은 고상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소유에 지배 받고 삽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실망해서 돌아간 사람들은 거의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그런 차원에 머물러 있을지 모릅니다. 아직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떠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떠나야겠다는 결단이 설 정도로는 예수님이나 제자의 길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들어도 자기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소유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흔히 보듯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소유의 길은 자기가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는 삶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제자의 길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에게만 집중하고 예수님께만 의지합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든지 못 받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여 아무것도 아님을 확인하며 참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까지 극복하신 분이십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계신 것은 생명의 법에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소유의 길은 죄와 사망의 법의 통치를 받는 길이지만 제자의 길은 생명의 성령의 법에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소유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찜찜해 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소유를 다 버릴 수 없습니다.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은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유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소유 지배적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의 길에 관심을 두고 집중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이 완전하게 딱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나를 주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유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지배하도록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유가 주도하던 생활이 축소되고 주님이 주도하는 영역이 확대될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죽을 때까지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자의 길은 싸움이고 몸부림이고 갈등이고 달음질 입니다. 금 매달은 이미 확보되었지만 과정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또한 생명의 길이요 즐거움의 길이요 희망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고난이 겹쳐 있지만 기쁨과 즐거움으로 제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에는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눅 14:33 -
예를 들어, 홍길동씨는 월 3,000불을 받는 회사원입니다. 그의 꿈은 개인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회를 찾다가 지금은 비즈니스를 준비 중입니다. 대강 계산을 해보니까, 1년 동안 가게 개설과 운영에 소요되는 금액은 10만 불이고, 예상 되는 연 수입은 10만 3천불입니다. 그러니까 비즈니스를 하게 되면 연 3천불의 이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길동씨가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비즈니스를 할 경우 기회비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명시적 비용(가게 개설에 투입하는 비용) 10만 불, 암묵적 비용(직장을 계속 다녔을 때 얻게 될 수입) 3만 6천불, 이 때 기회비용은 명시적 비용과 암묵적 비용을 합한 13만 6천불입니다. 이 경우 길동씨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직장 생활 하는 것보다 연 3만 3천불을 손해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곧 이익을 낼 수 있다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큰 것입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거나 전망이 좋지 않은 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오늘날처럼 전문적인 경제학자의 경기 예측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위험부담이 더욱 큽니다.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은 단순이 경제적 비용만 계산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비즈니스 능력과 경험 같은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 것에 대한 합리적 계산 없이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길동씨가 이런 것을 무시하고 비즈니스를 시작했다가 실패를 하니까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합니다. “길동씨가 사업하다가 쫄딱 망했다며? 처음부터 무리한다고 생각했어. 자금도 부족하고 능력도 경험도 없으면서 바보같이 왜 비즈니스를 해...”
예수님께서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과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예를 들어 제자의 길에 대하여 설명하셨습니다. 비즈니스나 전쟁이나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하듯이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기회비용을 계산해보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기회비용이란 인간의 능력이나 자격으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의 기회비용을 계산해 보지도 않고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 온 사람들을 단념시켜 돌려보내셨습니다(cf. 눅 9:57-62, 마 8:19-22). 제자 됨의 기회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마태보다 제자 됨의 기회비용에 대해 강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태는 부모나 자녀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마 10:37)고 하였지만 누가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가족을 미워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의 뜻은 제자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이 아니라 제자 된 자가 삶으로 감당해야 될 기회비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그 기회비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소유의 포기, 둘째, 고난 감수, 셋째, 목숨 포기입니다. 이 기회비용의 세 가지를 하나로 설명한 것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 기회비용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뜻은 100% 성공과 이익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공과 이익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과 기대가 주님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민족 독립 혁명의 기운을 감지하고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도덕적인 교훈에 감동받고 찾아왔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사회개혁을 꿈꾸며 찾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도 같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바라고 찾아 온 자들은 얼마 있지 않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이 예측은 그대로 적중합니다. 군중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는 몇 명의 여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예수님께 열광하며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제자 됨의 기회비용을 계산해 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동기에만 도취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병고치고, 부자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형통 축복 이런 것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의 목적이 빗나가면 언제든지 주님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런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기 때문에 제자 됨의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와 꿈을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것까지 버리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돈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사회적 명예나 이념이기도 하고 목숨이기도 합니다.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제자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소유 지향적입니다. 하지만 제자의 길은 그 반대로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길에서 모든 것을 버린 자가 여전히 소유 지향적으로 사는 것을 미리 막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도구요 조건들입니다. 따라서 소유 자체를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소유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늘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시장에서, 길거리에서, 호숫가에서, 성전 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이 예수님 일행을 먹고 마시기를 탐하고 수준 낮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게 가족 관계를 해체하라는 말씀이 아니었듯이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것도 소유 자체를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은 소유 지향적 삶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도 계속 소유의 길을 가려는 것이라면 길을 잘 못 잡은 것입니다. 마음 수련이나 고상한 인격을 쌓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도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인민 생활이 외로워서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면 그것도 길을 잘 못 든 것입니다. 그런 요소들이 교회 안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제자 됨의 본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에만 기대를 걸고 제자 됨의 차원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실망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고 예수님을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실망하게 될 사람이라면 미리 실망하는 게 났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소유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예수님께만 있습니다(요 6:58).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어렵다고 불평했습니다. 어렵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고,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못해서 어렵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적으로 무엇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로만 아는 게 아니라 그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수혜자로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수혜자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렵다고 했던 이들은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서 어려웠기도 했겠지만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확신과 이해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에 제자 됨의 기회비용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자 그럴 수는 없다고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과 소유 지향적 길에서 갈등하는 이유는 소유의 길도 너무 괜찮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교양 있게 살아가는 모든 삶은 고상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소유에 지배 받고 삽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실망해서 돌아간 사람들은 거의 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그런 차원에 머물러 있을지 모릅니다. 아직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떠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떠나야겠다는 결단이 설 정도로는 예수님이나 제자의 길을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들어도 자기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소유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흔히 보듯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소유의 길은 자기가 노력해서 뭔가를 이루는 삶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제자의 길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에게만 집중하고 예수님께만 의지합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든지 못 받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여 아무것도 아님을 확인하며 참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까지 극복하신 분이십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계신 것은 생명의 법에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소유의 길은 죄와 사망의 법의 통치를 받는 길이지만 제자의 길은 생명의 성령의 법에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소유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찜찜해 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소유를 다 버릴 수 없습니다.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은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유는 상식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소유 지배적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의 길에 관심을 두고 집중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제자의 길과 소유의 길이 완전하게 딱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나를 주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유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지배하도록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유가 주도하던 생활이 축소되고 주님이 주도하는 영역이 확대될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죽을 때까지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자의 길은 싸움이고 몸부림이고 갈등이고 달음질 입니다. 금 매달은 이미 확보되었지만 과정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또한 생명의 길이요 즐거움의 길이요 희망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고난이 겹쳐 있지만 기쁨과 즐거움으로 제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에는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눅 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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