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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확신의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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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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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은 구원과 믿음을 성경은 언약 관계로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언약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 당사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혼도 언약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의 당사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가문과 학벌과 외모와 재능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 자체가 신실하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으면 불안하고 불안한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과의 언약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과의 언약이라고 할 때 일반적인 언약과는 달리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언약 관계에서는 쌍방의 요구조건이 충족되어야 맺어질 수 있는데 반해 하나님과의 언약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능력이 아예 없다는 것을 전제한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인간은 신실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는 믿음의 근거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고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귀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귀한 것은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동물에게도 어느 정도의 판단하는 능력이 주어졌지만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판단 능력은 인간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인간은 이 판단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고귀한 존재로 살아갈 수도 있고 형편없는 인간으로 살아가게도 됩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판단 능력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지만 하나님을 알만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칼빈은 이것을 종교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올바른 판단의 방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의 판단 과정을 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바르고 옳은 것을 선택하고 판단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은 거의 쉼 없이 판단과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규모 없는 사람이라도 아무런 선택과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믿음생활에서도 인간의 선택과 판단 능력은 너무 중요합니다. 바른 복음과 거짓 복음을 분별하는 것도 선택과 판단에 의한 것이고 짜장면을 먹을 것인지 짬뽕을 먹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선택과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구약에도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있었고 초대 교회에도 거짓 선지자와 신실한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참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거짓을 잘못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인간에게 책임이 따릅니다.

믿음의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하고 판단할 때 흔히 일어나는 중대한 실수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믿음과 확신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두어야 합니다. 학문이나 큰 업적을 이루는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이나 물리적 규모는 은사로 귀한 것일 뿐 복음과 구원의 초석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온갖 이단 교리와 거짓 가르침이 일어났었습니다. 이단 교리와 거짓 가르침이 때로는 교회를 압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순진한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와 교사들의 탁월한 논리와 학문적 깊이와 감동적 진정성과 위대한 업적과 신비한 현상에 압도되었던 적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WCC의 규모에 압도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많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예배당과 교인 수에 압도되는 목회자와 교인들도 많습니다. 큰 교회 목회자가 엄청난 돈을 횡령하고 배임죄로 법정과 감옥을 드나들고 거짓말을 하고 복음을 왜곡해도 교회의 외적 규모에 압도되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교회를 세웠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큰 물리적 규모를 복음과 구원의 기초로 삼는 심각한 실수입니다.

학문적 권위에 압도되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학교수가 신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상한 집회를 인도하고 다니면 인기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교회들이 그런 사람을 서로 초청하려고 경쟁을 벌입니다. 그 사람이 바른 복음 진리를 전하느냐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교회들을 많이 모이게 해 준다면 가수나 코미디언이나 교수나 전직 장관이나 상관없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교회 강단이 버라이어티 쇼의 무대를 방불케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 수천억짜리 초호화 예배당과 시설이 사람들을 압도하기도 하고, 목회자의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 하고 말재간이 뛰어나고 유머가 넘치고 설교가 약간의 논리만 서면 그야말로 인기가 유명 연예인을 능가합니다. 그런 목회자의 설교를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교회는 그와 같은 목회자를 찾고 목회자는 인기 있는 목회자가 되려고 합니다. 목회자의 도덕성과 윤리성과 인성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됩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넘어지는 일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문제를 일으켜도 교회나 노회나 총회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염려하지 않고 운영에 타격을 입을까 만 염려하여 대처합니다. 허영과 위선과 거짓과 범법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합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성경을 온갖 세속과 거짓과 가짜를 용납하는 근거로 편리하게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일의 물리적인 규모와 결과를 가지고 그의 백성을 설득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과 광야 40년의 과정에서 있었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설득하는데 시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사건들을 경험했으면서도 믿음에서 떠났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가시적인 물리적 사건이나 신비로운 이적이나 학문이나 논리적 탁월성 같은 것은 진리를 증거 하는데 역부족입니다. 그런 것이 전혀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도 바른 진리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차원에서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믿음과 경건을 종교심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경건은 종교심이 아닙니다. 예배 드리고 기도 드리고 헌금 드리고 구제 하는 것으로 안심하는 것은 종교심입니다. 참 믿음과 경건은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아는 깨달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예배당, 헌신적인 선교의 열정, 신비한 체험, 구제와 봉사활동, 윤리와 도덕 같은 것 위에 믿음의 토대를 놓으면 그런 것들이 무너질 때 믿음도 무너집니다. 물리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삼위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구속의 일만이 믿음과 확신의 근거가 됩니다. 유용성이나 일의 규모나 결과로 판단해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믿음의 근거입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대조로 설명합니다. 어두움을 무지와 악이라고 하였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빛과 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친히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면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사람이 전할 때 우리는 바르게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시고 보낸 사도들의 증거를 받고도 참 복음을 버리고 거짓 복음을 좇아간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들도 학문이나 논리나 은사나 업적이나 진정성 같은 것을 복음과 믿음의 근거로 잘못 선택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복음이나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 고전 3: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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