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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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3-12-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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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최고의 법이고 계명입니다. 사랑보다 큰 사상이나 이념이나 철학이나 가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 가운데 모든 가르침과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결국 율법도 사랑이고 복음도 사랑입니다. 구약에는 수많은 율법과 규례와 교훈과 가르침이 있고 성일과 제도와 명령들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너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도 결국 사랑을 구체화 한 것입니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제사법에서부터 정치와 사회적 규범과 형법과 민법과 윤리와 도덕과 나아가서는 자연과 동물에 대한 의무까지도 사랑을 구체화 한 명령이고 가르침이며 교훈입니다. 심지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인간 활동의 사소한 모든 것들까지도 사랑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일체의 이론(異論)을 할 수 없게 하는 말씀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많은 정의와 설명과 교훈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사실을 구체화 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모든 하나님 자녀들의 의무요 책임일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사랑이 의무요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 사랑이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세상의 사랑은 의무와 책임으로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은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이란 그냥 두면 하지 않는 것을 명령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정 반대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사랑스러운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는 대상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할 때 사랑할 가치가 없는 대상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사랑의 본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기에는 오르지 못할 나무이고, 그렇다고 외면하기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과 진실을 요구하지만 현실은 좌절과 허세로 나타납니다. 좌절은 사랑의 실천을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기고 아예 포기하는 것이고, 허세는 마치 그 사랑을 다 실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반응이 한 부자가 예수님께 찾아갔던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부자의 영생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부자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허세를 부렸고,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좌절하였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좌절하는 반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과 목회자들 중에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랑의 계명에 대해 겸손과 진실을 회피하는 것은 거짓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의 명령에 좌절하게 되고 또는 허세를 부리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나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싫어하거나 시기하거나 나아가서는 나를 해롭게 하는 원수이기 때문에 겸손하거나 진실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기란 죽기보다 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 없어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솔직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요나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요나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불순종한 전형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학적 지식,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그만큼 깊은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에도 남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가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자기의 감정과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죄를 많이 지어 심판을 받아 죽게 되었으니 가서 회개시키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셨다가 회개하자 살려주시고 다시 니느웨로 보냅니다. 요나는 죽다가 살아나 다시 가서 회개를 외치면서도 그 도시가 회개하지 않고 망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성이 회개를 합니다. 그러자 요나는 울분을 터뜨립니다. 그가 성내며 울분을 터뜨리는 말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지식이 드러납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불순종했던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것입니다(욘 4:1-5).
기독교인 중에 요나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선교에 힘쓰면서도 일본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북한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이나 북한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가족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대목이 사실 가장 어렵고 힘든 부분입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봉사는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기 싫고 하기가 어렵고 힘든 일인대도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야 말로 값진 봉사요 충성입니다. 우리에게는 싫은 사람이 너무 많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너무 많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고 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나는 우리가 숨기고 감추고 변명하는 모든 거짓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사랑의 명령에 대해 좌절이나 허세 모두 불순종인데, 그 이유의 핵심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어쩌면 요나처럼(?) 진실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노력하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즉 하나님 자녀는 자기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처럼 그 존재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에 능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향해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임을 사랑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통해 어떤 사랑의 열매가 맺어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님을 믿고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갈등이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됨과 그리스도인임을 더욱 확신하게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느낌과 현실을 부인하거나 감추면 안 됩니다. 부정해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역시 부족하여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거리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내도 모르고 남편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지만 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는 실수와 죄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양심 앞에 우리는 불안합니다. 율법과 양심의 법정에서는 우리가 정죄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양심보다 크신 하나님, 최고의 법정에서 죄 없다, 의롭다 선언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20 –
따라서 사랑은 모든 하나님 자녀들의 의무요 책임일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사랑이 의무요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 사랑이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세상의 사랑은 의무와 책임으로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명령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은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이란 그냥 두면 하지 않는 것을 명령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정 반대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사랑스러운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는 대상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할 때 사랑할 가치가 없는 대상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사랑의 본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기에는 오르지 못할 나무이고, 그렇다고 외면하기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과 진실을 요구하지만 현실은 좌절과 허세로 나타납니다. 좌절은 사랑의 실천을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기고 아예 포기하는 것이고, 허세는 마치 그 사랑을 다 실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반응이 한 부자가 예수님께 찾아갔던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부자의 영생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부자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허세를 부렸고,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좌절하였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좌절하는 반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과 목회자들 중에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랑의 계명에 대해 겸손과 진실을 회피하는 것은 거짓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의 명령에 좌절하게 되고 또는 허세를 부리게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이 나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싫어하거나 시기하거나 나아가서는 나를 해롭게 하는 원수이기 때문에 겸손하거나 진실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기란 죽기보다 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 없어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솔직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요나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요나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불순종한 전형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학적 지식,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그만큼 깊은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에도 남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가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자기의 감정과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죄를 많이 지어 심판을 받아 죽게 되었으니 가서 회개시키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셨다가 회개하자 살려주시고 다시 니느웨로 보냅니다. 요나는 죽다가 살아나 다시 가서 회개를 외치면서도 그 도시가 회개하지 않고 망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성이 회개를 합니다. 그러자 요나는 울분을 터뜨립니다. 그가 성내며 울분을 터뜨리는 말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지식이 드러납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불순종했던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것입니다(욘 4:1-5).
기독교인 중에 요나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선교에 힘쓰면서도 일본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북한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이나 북한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가족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대목이 사실 가장 어렵고 힘든 부분입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봉사는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기 싫고 하기가 어렵고 힘든 일인대도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야 말로 값진 봉사요 충성입니다. 우리에게는 싫은 사람이 너무 많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너무 많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고 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나는 우리가 숨기고 감추고 변명하는 모든 거짓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사랑의 명령에 대해 좌절이나 허세 모두 불순종인데, 그 이유의 핵심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어쩌면 요나처럼(?) 진실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노력하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즉 하나님 자녀는 자기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처럼 그 존재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에 능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향해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임을 사랑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통해 어떤 사랑의 열매가 맺어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님을 믿고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갈등이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됨과 그리스도인임을 더욱 확신하게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느낌과 현실을 부인하거나 감추면 안 됩니다. 부정해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역시 부족하여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거리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내도 모르고 남편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지만 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는 실수와 죄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양심 앞에 우리는 불안합니다. 율법과 양심의 법정에서는 우리가 정죄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양심보다 크신 하나님, 최고의 법정에서 죄 없다, 의롭다 선언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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