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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같이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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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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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가인은 인류 최초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인 동생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원수도 아닌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그 범죄는 더 충격적입니다. 그 사건을 기록한 창세기에 의하면 그가 동생을 죽인 후에도 계속하여 하나님과 대화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살인자와 대화하시는 하나님 ..., 이 상황에 이미 복음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 대화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범죄를 추궁하시고 가인은 자신의 범죄를 숨기고 거짓말 하고 변명하지만 결국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 죄책감으로 인한 괴로움과 두려움을 토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가인을 보호하여 아무도 가인을 해하지 못하도록 특별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인은 하나님의 그 특별 배려의 조치를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믿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가인의 삶이 인류 문명의 성격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가인을 단순한 살인자로 다루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의 전형으로 다룹니다. 그가 마귀에게 속했다는 증거가 곧 형제를 죽이는 살인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까지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배려를 믿었더라면 성을 쌓을 필요도 칼을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를 공동번역은 “카인은 악마의 자식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자입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가인이 생물학적으로 악마가 낳은 자식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즉 악마가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통일교를 비롯하여 이단들 중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나 마귀의 자녀라고 한 것은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입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는 교훈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의 소극적인 교훈입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인 것은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하였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살인은 원한 관계에서 또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고의적으로 저질러지기도 합니다. 이런 동기의 살인도 악한 자에게 속한 결과이지만 가인의 살인 동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경우 자기 행위는 악하고 동생의 행위는 의로운 것이 살인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 동기가 그의 신분, 즉 정체성으로부터 나왔는데 그의 정체는 마귀의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 8:44)고 하시면서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앞세우고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이 최초의 살인자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교활하여 율법과 하나님 사랑을 빙자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고 실제로 죽였습니다.

요한이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하여 동생을 “죽였으니”라고 했을 때 사용한 스파조(σφάζω, slay slain, slew. σφάττω-to slaughter, to slay, as animals for food or in sacrifice; hence, of persons, to slay)는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강역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단어로서 사고로 살인한 경우가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짜 놓은 계획에 따라 저지른 살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드린 제사가 열납되지 않자 분노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고 하셨습니다. 가인은 자기는 악하고 아벨은 의롭다는 사실로 인하여 미움과 증오를 키우기 시작하였고 그 미움과 증오의 궁극적인 열매는 살인인데, 그 살인은 그에게 영생이 없음과 그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자기는 악하고 동생은 의롭다는 사실로 인하여 분노할 때 이미 그는 스스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추궁은 그가 어떤 형태로든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는 사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제공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악행으로 마귀의 자녀임을 증거 하였고, 아벨은 선행으로 하나님 자녀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된 것은 그가 의로운 자라는 증거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합니다(히 11:4). 이런 증언으로 보아 아벨은 가인처럼 분노가 특징이 된 삶을 살지 않고 감사가 특징이 되는 삶을 산 것이 분명합니다.

가인에게는 분노가 가득하였습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는 악한데 다른 사람은 의롭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 스스로 자발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기를 바라셔서 그에게 말을 걸어오셨지만 그는 시종일관 문제의 핵심이 아닌 것을 문제 삼으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정의와 공평과 사랑을 구호처럼 외치며 자기들의 악한 의도를 숨기지만 궁극적으로는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드러내고 맙니다. 세상에는 분노에 가득 차서 독설을 내 뱉으며 시기와 미움과 증오심을 부추기는 언행을 삼가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계에도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과도한 도의적 책임을 지도자에게 요구하며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교활하고 사특하게 처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들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궁극적으로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요한이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제시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까닭 없이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였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죽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사랑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그 특별한 사랑의 수혜자로서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의 특별 수혜자로 그 사랑을 아는 자는 예수님처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기회는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는 못해도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길을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물질적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과 그 재물을 나누어 쓰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넉넉해도 절약하지 않으면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 세간에 화제가 된 잭 맥도날드 라는 분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기분 좋은 뉴스가 되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스크루지 같은 구두쇠 영감으로, 또는 가난한 은퇴 노인으로만 알려졌을 만큼 근검절약의 생활을 한 그가 억만장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죽으면서 $187.6 million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 것 때문에 알려졌습니다. 부모가 물러준 유산과 자신이 변호사로 30년 동안 번 재산을 아끼고 절약하며 잘 관리하였다가 경제적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허름한 은퇴자 아파트에 살면서 언제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쇼핑할 때는 언제나 모아두었던 할인 쿠폰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분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부자였지만 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보다 훨씬 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엄청난 재물을 쌓아 놓고 그것을 누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사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소식은 조금이라도 더 여유 있고 넉넉하게 살고 싶은 나의 소시민적인 욕심마저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교훈과 예수님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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