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이유는 소유가 아닌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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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3-11-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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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에서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인격적이거나 윤리적인 수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의 자녀도 알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이런 논리로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설명하게 되면 그 설명 자체가 복음 증거가 되고 경건한 삶의 능력이 되며 또한 아무도 경건의 수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의 특징들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도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 된 사람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땅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이 세상 삶의 가치를 무시하고 염세적(厭世的)이 되면 안 됩니다. 염세적이란 인생에 절망하고, 세상을 덧없이 여기며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삶에 그런 요소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이원론적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것들이라도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의 확신 가운데 서서 보면 모든 것이 귀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먹는 것이든 마시는 것이든 그것이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는 농사지은 것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추수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추수감사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그 정신을 기리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정신은 말 그대로 땀 흘리고 수고하여 지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앞 17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재물을 좀 모으면 자기의 능력으로 얻은 줄 안다고 지적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못하도록 18절에서 딱 못을 박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지을 능력”을 주셨다고 하지 않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재물 얻는 길이 현대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농사나 목축이나 장사 같은 것으로 재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해서 제물을 얻었든지 간에 그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건 간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잘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재물을 얻게 하시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재물의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의 일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아지게 하시고 또한 많은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 성취의 일환으로 재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재물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재물 자체를 인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만 감사하는 것은 믿음의 감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의 경우, 그는 스스로 아들의 자격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 대우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품꾼의 한 사람으로 써 주신다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시고 그를 위하여 손님을 청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때 만약에 탕자가 아버지가 입혀 주신 새 옷이나 금가락지가 비싼 것이라는 사실에만 감동했다면 그는 바보요 정신박약아입니다. 자격 없는 자신을 아들로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해 감동하고 감사해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만으로만 감사한다면 바보요 정신박약아입니다. 물질 주신 것, 건강 주신 것, 명예 주신 것, 아름다운 목소리 주신 것, 좋은 아이큐 주신 것, 그 외 어떤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감사요 진정한 추수감사의 정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재물을 많이 얻어야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일까요? 반드시 건강하고 형통하고 출세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 됨의 증거라면 우리는 좀 불안합니다. 그런 것 만으로만 감사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 중에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반드시 다 부자 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 건강하고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난하게도 되고 병들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로 힘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감사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성경은 감사의 조건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넉넉한 물질을 주신 것을 인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을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까 다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해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입니다(합 3:17-1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유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존재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가 감사와 기쁨과 행복의 이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옛 피조물을 생각하게 합니다. 옛 피조물이란 범죄하여 타락한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모든 피조물은 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우리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 관계를 회복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고후 5:18).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 관계를 회복시킬 능력도 없는 구제불능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입니다. 감사, 찬송, 영광, 경건, 덕, 정의, 윤리, 성공, 형통, 화해, 통일, 일치, 연합 그 어떤 것일지라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되고서야 가능합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이요 감사의 계절입니다. 온 교회가 감사절로 지킵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중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 자녀,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소유 때문이 아니라 존재 때문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시 23:1 –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의 특징들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도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 된 사람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땅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이 세상 삶의 가치를 무시하고 염세적(厭世的)이 되면 안 됩니다. 염세적이란 인생에 절망하고, 세상을 덧없이 여기며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삶에 그런 요소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이원론적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것들이라도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의 확신 가운데 서서 보면 모든 것이 귀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먹는 것이든 마시는 것이든 그것이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은 말 그대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는 농사지은 것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추수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추수감사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그 정신을 기리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정신은 말 그대로 땀 흘리고 수고하여 지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앞 17절에 의하면 사람들은 재물을 좀 모으면 자기의 능력으로 얻은 줄 안다고 지적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못하도록 18절에서 딱 못을 박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지을 능력”을 주셨다고 하지 않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재물 얻는 길이 현대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농사나 목축이나 장사 같은 것으로 재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해서 제물을 얻었든지 간에 그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건 간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잘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재물을 얻게 하시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재물의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의 일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아지게 하시고 또한 많은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 성취의 일환으로 재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재물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재물 자체를 인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만 감사하는 것은 믿음의 감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의 경우, 그는 스스로 아들의 자격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 대우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품꾼의 한 사람으로 써 주신다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시고 그를 위하여 손님을 청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때 만약에 탕자가 아버지가 입혀 주신 새 옷이나 금가락지가 비싼 것이라는 사실에만 감동했다면 그는 바보요 정신박약아입니다. 자격 없는 자신을 아들로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해 감동하고 감사해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만으로만 감사한다면 바보요 정신박약아입니다. 물질 주신 것, 건강 주신 것, 명예 주신 것, 아름다운 목소리 주신 것, 좋은 아이큐 주신 것, 그 외 어떤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감사요 진정한 추수감사의 정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재물을 많이 얻어야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일까요? 반드시 건강하고 형통하고 출세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 됨의 증거라면 우리는 좀 불안합니다. 그런 것 만으로만 감사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 중에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반드시 다 부자 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 건강하고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난하게도 되고 병들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로 힘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감사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성경은 감사의 조건이 소유가 아니라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넉넉한 물질을 주신 것을 인하여도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을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까 다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해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입니다(합 3:17-1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유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존재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가 감사와 기쁨과 행복의 이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옛 피조물을 생각하게 합니다. 옛 피조물이란 범죄하여 타락한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모든 피조물은 죄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우리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에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 관계를 회복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고후 5:18).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 관계를 회복시킬 능력도 없는 구제불능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하나님의 자녀, 즉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입니다. 감사, 찬송, 영광, 경건, 덕, 정의, 윤리, 성공, 형통, 화해, 통일, 일치, 연합 그 어떤 것일지라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되고서야 가능합니다. 11월은 감사의 달이요 감사의 계절입니다. 온 교회가 감사절로 지킵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중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 자녀,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소유 때문이 아니라 존재 때문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시 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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