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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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3-11-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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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사랑”만큼 위대하고 핵심적인 개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나 하나님 백성의 서로에 대한 사랑이 다 같은 것입니다. 이 사랑이 고귀한 만큼 성경에는 사이비 사랑에 대한 경계의 말씀도 많습니다. 사이비 사랑이란 말로만 하는 사랑일수도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에 비하면 사이비 사랑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나은 것이지만, 그런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아니라는 면에서 사이비 사랑인 셈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서 자기에게 좋게 하는 자를 대상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수준의 사랑은 굳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사랑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본능적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모든 사람과 그 외 모든 피조물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명시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동물 보호와 식물 파종은 물론 땅을 관리하는 것에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동식물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한 순간 당황스러운 말씀을 만납니다. 그 말씀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 구절만큼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구절도 많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사실상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도 사랑해야 하고 자연도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고 또한 모든 것을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논리적 모순을 인위적으로 설명한 이들이 초대교회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이원론으로 이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였습니다. 참신과 거짓 신, 선과 악,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상이 대립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이해에서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영혼과 교회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성경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 때 “세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이라는 말을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먼저는 인간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지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그 세력을 지칭하여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후자를 지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처럼 오해하는 일이 교회 안에 너무 심각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원론자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는 말씀인데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가 이원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두 이원론의 영향입니다. 한국의기독교인들이 희랍의 이원론을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원론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종교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민속 문화에 자생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란 사람을 비롯한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사탄의 지배아래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력이나 경향이나 사상이나 가치관 같은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세상은 하나님의 대상, 즉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면 당연히 그를 믿는 이들도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세상을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은 악한 자에게 사로잡혀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력, 경향, 추종, 용인, 협력, 무지 등입니다. 계몽주의가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그 핵심적 특징이 반기독교적이라는 점에서 사랑해서는 안 될 세상인 셈입니다. 성경은 세상 자체, 사람 자체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력과 경향과 일들에 협조하거나 주도하거나 장려하거나 묵인하거나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속성, 즉 세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적대적인 경향과 세력입니다. 이런 세속성은 피상적인 사상과 언어와 문화를 통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옳은 것 같고 정의를 외치고 불법을 고발하는 것 같지만 그 속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항하는 세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상적으로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이들 중에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표면적 주장은 정의와 공평과 약자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항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크게는 공산주의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하는 대표적인 경우이고, 지금은 자본주의도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이 현저합니다. 우리가 정치와 경제를 이런 차원에서 바라보고 판단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라고 무조건 두둔할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라고 무조건 비판할 일도 아닙니다. 보수나 진보를 무턱대고 지지하고 따르는 기독교인은 너무 유치한 수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상이나 제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느냐 반역하느냐로 판단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나치 독일이나, 일본의 야만적 침약 행위 같은 것은 명백한 세속성입니다. 위안부 문제 같은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그러나 부시의 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정책 또한 본문이 경고하는 세속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성결혼의 합법화 같은 것도 본문이 경고하는 세속성입니다. 나아가서는 반환경정책 같은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의 세속성, 자기 교회나 자기 나라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세속성, 복음이나 하나님을 재 서술하려는 세속성을 분별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 수많은 새로운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것들을 공약하는 정치인들을 투표로 뽑을 때는 잘 살펴야 하고, 그런 정책들이 시행될 때도 시민의 권리를 십분 활용하여 하나님께 반역적인 정책은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정책들은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 모든 활동들도 이런 분별력을 가지고 시행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와 구제와 지역 사회 봉사 활동 같은 것도 이런 기준에서 분별하여 참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속성으로서의 세상은 좋아하거나 참여하거나 협조하거나 묵인하지도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람과 자연과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이기적인 마음은 세상을 세속적이 되게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좋아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과 가치들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의 모든 것은 제 가치를 갖게 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편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요한일서 2:15-17 –
사랑은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서 자기에게 좋게 하는 자를 대상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수준의 사랑은 굳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사랑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본능적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모든 사람과 그 외 모든 피조물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명시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동물 보호와 식물 파종은 물론 땅을 관리하는 것에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도록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동식물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란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한 순간 당황스러운 말씀을 만납니다. 그 말씀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 구절만큼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구절도 많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사실상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도 사랑해야 하고 자연도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고 또한 모든 것을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논리적 모순을 인위적으로 설명한 이들이 초대교회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이원론으로 이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였습니다. 참신과 거짓 신, 선과 악,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상이 대립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이해에서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영혼과 교회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은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거짓 가르침입니다.
성경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 때 “세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이라는 말을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먼저는 인간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지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 그 세력을 지칭하여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후자를 지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처럼 오해하는 일이 교회 안에 너무 심각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원론자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는 말씀인데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가 이원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두 이원론의 영향입니다. 한국의기독교인들이 희랍의 이원론을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원론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종교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민속 문화에 자생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란 사람을 비롯한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사탄의 지배아래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력이나 경향이나 사상이나 가치관 같은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세상은 하나님의 대상, 즉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면 당연히 그를 믿는 이들도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세상을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은 악한 자에게 사로잡혀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력, 경향, 추종, 용인, 협력, 무지 등입니다. 계몽주의가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그 핵심적 특징이 반기독교적이라는 점에서 사랑해서는 안 될 세상인 셈입니다. 성경은 세상 자체, 사람 자체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력과 경향과 일들에 협조하거나 주도하거나 장려하거나 묵인하거나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속성, 즉 세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적대적인 경향과 세력입니다. 이런 세속성은 피상적인 사상과 언어와 문화를 통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옳은 것 같고 정의를 외치고 불법을 고발하는 것 같지만 그 속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항하는 세력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상적으로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이들 중에 그런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표면적 주장은 정의와 공평과 약자를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항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크게는 공산주의가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하는 대표적인 경우이고, 지금은 자본주의도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이 현저합니다. 우리가 정치와 경제를 이런 차원에서 바라보고 판단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라고 무조건 두둔할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라고 무조건 비판할 일도 아닙니다. 보수나 진보를 무턱대고 지지하고 따르는 기독교인은 너무 유치한 수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상이나 제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느냐 반역하느냐로 판단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나치 독일이나, 일본의 야만적 침약 행위 같은 것은 명백한 세속성입니다. 위안부 문제 같은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그러나 부시의 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정책 또한 본문이 경고하는 세속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성결혼의 합법화 같은 것도 본문이 경고하는 세속성입니다. 나아가서는 반환경정책 같은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의 세속성, 자기 교회나 자기 나라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세속성, 복음이나 하나님을 재 서술하려는 세속성을 분별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 수많은 새로운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것들을 공약하는 정치인들을 투표로 뽑을 때는 잘 살펴야 하고, 그런 정책들이 시행될 때도 시민의 권리를 십분 활용하여 하나님께 반역적인 정책은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정책들은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 모든 활동들도 이런 분별력을 가지고 시행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와 구제와 지역 사회 봉사 활동 같은 것도 이런 기준에서 분별하여 참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속성으로서의 세상은 좋아하거나 참여하거나 협조하거나 묵인하지도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람과 자연과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이기적인 마음은 세상을 세속적이 되게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좋아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과 가치들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의 모든 것은 제 가치를 갖게 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편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요한일서 2: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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