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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절대 원리이고 최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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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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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모여 있는 곳 중에 아무 문제도 없는 곳은 공동묘지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에 대처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없고 문제로 인하여 고민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고 또한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에 대처하는 태도와 방법과 목적에는 반드시 가치 평가가 따릅니다.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의 삶도 가치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돌아보며 사랑하며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누구에 대해서도 가인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사랑만큼 위대하고 심오하고 측정이 불가능한 사상이나 철학이나 교리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체험이나 은사는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 같은 가르침의 교훈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한 구절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떤 위대한 신학과 사상과 철학과 지식과 이념이 있다고 해도 이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개념들 뿐 아니라 삶의 사소한 것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출퇴근, 직장에서 하는 일, 부엌에서 하는 일, 학교에서 하는 일, 인간관계, 여행, 운전, 컴퓨터, 게임, 음악, 영화감상, 독서, 밥 먹는 것, 다른 사람과의 대화, 분쟁과 논쟁에 대처하는 태도와 방식... 그 외 어떤 것이라도 이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그 가치가 제로가 될 뿐 아니라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랑에 의해서 참 믿음과 헛된 믿음, 바른 신학과 그릇된 신학,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문화와 좋지 않은 문화, 바른 정치와 나쁜 정치가 구별되고, 나아가 경제, 교육, 군사, 예술, 비즈니스... 등 온갖 것의 가치도 이 사랑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이 참 제자인가를 증거 한다고 하셨습니다(요 13:34-35).

초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 안에는 심각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약간 경향이 다른 정도의 사람들이 대립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믿으려는 사람들과 적그리스도가 한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대립과 갈등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혼합종교와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거짓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런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교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랑으로 거짓 교사와 이단들에 대처하며 신자들을 가르칩니다. 언뜻 생각하면 거짓과 이단들에게 사랑으로 대처하는 것이 소극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으로 거짓 교사들과 적그리스도를 판별하여 적시(摘示)하였습니다. 주장하는 교리와 신학, 사상과 철학과 이념이 아무리 탁월해도 사랑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교회나 신학자들이 교리와 신학논쟁을 할 때 종종 이 점에서 실패하곤 했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바른 교회를 세워 가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들이지만 사랑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교리와 신학과 어떤 지식이나 체험이나 은사라도 이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그 정당성이 주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진위를 가리는 원리요 기준이며 잣대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는 이들 중에 교리적인 논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리나 신학은 분쟁만 일으키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법정이 늘 싸움만 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쁜 곳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사랑의 진정한 의미의 무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안 싸우면 좋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복음의 진리는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부정하고 공격하기 때문에 싸움을 피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을 영적 군사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리적인 싸움을 하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교리적 싸움을 할 능력이 없으면 헤게모니 싸움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헤게모니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바른 교회를 세워갈 능력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없는, 진리에 대한 나이브한 수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와 신자들은 모든 것을 판단할 기준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합니다. 모든 것을 가시적 외형이나 물리적 규모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교회 건물이 크고 웅장하든지 모이는 수가 많으면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가 크거나 작거나 한 것이 바른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과 진리에 든든히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신도 뿐 아니라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도 교회나 지도자를 물리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적 능력과 이해는 교회의 가치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이해하고 수종드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나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면 규모나 느낌이나 체험이나 이론과 논리에 치우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감성적이고 주관적이지만 교리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입니다. 주관적 체험도 소중하지만 그 진위는 언제나 객관적인 말씀에 의해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것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교리나 신학이나 체험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도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옳다는 주장을 하다가 사랑을 훼손하곤 합니다. 화를 내면서, 심지어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자신의 정당성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옳고 정당한 것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옳고 정당한 것이 사랑을 훼손한다면 옳고 정당한 것보다 사랑을 실현하고 증명하는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산을 옮기는 업적이나 천사의 아름다움이나 목숨을 버리는 희생이라도 그것이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가치 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정의나 아름다움이나 희생이나 덕이나 그 외 모든 고귀한 가치들과 대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가치와 은사와 능력과 지혜와 지식이 사랑이 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몇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자랑용이 아니고 자기변명용도 아니고 자기의 정당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고, 체험이 아무리 대단하고, 지식이 아무리 심오해도 사랑에 기여할 때 유익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거나 주장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들은 교만하고 무례하고 이기적이고 이론과 논리가 탁월합니다. 그런 특성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이단의 특성은 우리 자신의 특성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자신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랑하고 교만하도 무례하고 이기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거짓교사들은 교만과 자랑과 무례함과 이기적으로 신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그런 것 뿐 아닙니다. 때로는 울고 진지하고 감동적이고 온갖 체험과 감성적인 언어로 도전해 옵니다. 그래서 믿음 약한 신자들이 속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랑에 실패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직접적으로 상대와 관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 상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는 예수가 은폐되지만 성경적 사랑은 자신을 은폐하고 예수님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대단한 수준임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했던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3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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