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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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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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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한 것은 인간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불완전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존재와 가치를 불완전한 인간이 논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또한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 것들에 대한 인식도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계시이고 그 계시를 깨닫는 능력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것과 불완전 한 것의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불완전하다고 하여 그 가치까지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인간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인간보다 못하지만 천하 즉 물질적인 것의 가치 또한 귀한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간에게 복으로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 여 년 동안 불완전한 모든 것을 완전한 하나님과 비교하여 지나치게 그 가치를 폄하하였습니다. 성경은 불완전한 인간이나 물질을 절대시 하는 것은 우상이라 하여 엄히 경계하였지만 불완전한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것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불완전 한 것의 가치를 폄하한 것이지 그것이 무가치 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라는 인식과 믿음의 전제(前提)이고 그 다음은 불완전 모든 것에 대한 바른 인식인데, 불완전 것은 불완전하다는 전제 하에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현대 정신과 철학의 오류는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까지 불완전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가 이러한 사상과 철학에 과민하게 대응하여 절대적인 전제만을 강조하다가 불완전 한 것들의 가치를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속 사상과 철학의 도전에 대응하려면 절대적 전제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코르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의 주창은 너무나도 귀한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이성의 능력에 호소해서 기독교가 다른 것에 비해 얼마나 더 개연성이 높은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을 이성의 권위에 종속시키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따르는 가톨릭은 그와 같은 방법을 채택하여 자연신학의 기초 위에 계시신학을 세울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에서도 그와 같은 방식을 취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개혁신학 안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이성의 권위를 높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전제주의가 이성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제주의는 비그리스도인들의 전제인 ‘우연’으로는 그 어떤 원인이나 질서나 합리성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드러내고 지적합니다. 그 후에 인간의 삶과 실재가 기독교적 전제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고 비그리스도인 안에 억압되고 있는 신 의식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또한 변증하였습니다.

많은 초대교회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사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사상적으로는 헬라의 철학과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혼합종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 혼합 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상이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은 소아시아 여러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원론적 혼합종교는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이어서 지식인들에게 어필하였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기독교 복음이 비논리적이고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재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현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현설은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육체적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창조도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가 아니고 불완전한 철학적 신인 데미울고스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에게는 영생도 구원도 없다.’고 하였고, ‘영생과 구원은 우리에게만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을 영지주의라고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은 영적 지식을 깨달아 죄 문제를 초월했다고 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바르게 믿는 신자들을 회유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거의 모든 이들이 설득되어 교회를 떠났습니다(딤후 1:15). 당시 소아시아 교회는 이와 같은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의 지식과 이론과 합리적 논리에 압도되고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라고 쓰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논리와 합리성으로 복음을 왜곡하였고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에게 압도되고 위축되어 있을 때 요한은 그 연약한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와 논리와 합리가 생기기 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일갈하였습니다. 역사와 논리와 합리성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복음과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함에 있어서 전제를 제시하였습니다. 그 전제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절대적 전제만 제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전제인“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감각적인 체험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습니다. 듣고 보고 만지는 것은 감각적인 것이기에 불완전 합니다. 하지만 불완전 것이 무가치 한 것은 아닙니다. 불완전 한 것이라도 성령님에 의하여 완전한 것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불완전한 것도 온전하게 되겠지만 이 땅에서 불완전한 것은 온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불완전한 것을 사용하여 온전한 것의 효과를 나타내시지만 그렇다고 불완전한 것이 온전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였는데, 보배를 담아도 질그릇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불완전한 것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전제만 되풀이 하면 아무도 복음을 들을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우리가 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적 차원과 권위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지식의 깊고 넓고 풍성한 데로 점점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그런 노력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과 체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러한 수준과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아직 복음의 초보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린 자들에게는 어린아이의 말로 설명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복음을 “들었다. 보았다. 만졌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 직접 들었고, 그분을 직접 보았고, 접촉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듣고 보고 만지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이라고 다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것은 능력의 문제이지 존재 자체가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식으로 불완전하고 능력으로 불완전해도 불완전한대로 귀한 것입니다. 이성과 역사와 논리가 불완전해도 그 나름의 가치와 효용성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입니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 문제이지 불완전한 것을 불완전한대로 받으면 귀한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요일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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