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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과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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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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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행위가 아니라는 뜻의 역설적 표현으로 믿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믿음이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서로 대치되는 긴장관계가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입니다. 흔히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대치 관계로 설정해 놓고 믿음의 우위를 강조하거나 또는 아는 것의 우위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 문제로 인한 많은 논쟁이 있었고 그 논쟁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설교자들 중에는 아는 것보다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는 것이 아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예화도 많은데, 그 예화들의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면 아는 것이 전제되지 않은 믿음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했을 때, 믿음 보다 앞서는 것은 전능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한지 무능한지 창조자인지 피조물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 이는 없습니다. 물론 그 앎이란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지만 앎이 전제되지 않는 믿음이란 없습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대상인 진리나 하나님의 뜻은 합리성과 논리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자칫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看過)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이 합리성과 논리성을 초월한다고 해서 인식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인식을 무시한 믿음을 가르치거나 강조하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은 바른 앎을 전제할 뿐 아니라 알아가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 감을 소홀히 하고 믿음만을 강조하는 경우 종교적 외형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발생합니다. 오늘날 예배가 화려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화려해진 예배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인간에 대한 관심만 강조된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란 대중적이며 부담을 주지 않고 감동을 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동원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이 그 말씀을 싫어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대중성이 없고 인간의 요구에 부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대중을 열광시키지만 참 선지자의 메시지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온갖 경험을 다 하면서도 돌아서면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바알을 섬기고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랐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에 대한 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그런 모습을 보고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성경을 오해하는 생각입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 싫어한 이스라엘은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거의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을 긴장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긴장이 없는 것은 바른 메시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른 메시지가 선포되는데도 긴장이 없다면 그것은 두 가지 경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메시지를 듣고 긴장을 은폐하는 경우입니다. 아마 후자인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를 긴장시키지만 그 긴장을 드러내게 되면 서로가 불편하기 때문에 태연한 체 하고 믿음(?)과 은혜(?)에만 열광하는 것입니다. 소위 광신적 특징을 드러냅니다. 광신은 인간의 자기만족 추구의 극단적 형태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을 영적 음란으로 취급합니다.

구약의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우상숭배와 음란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사람들을 본받은 것인데, 가나안 종교의 바알은 다산(多産)의 신입니다. 비교적 좋은 땅에서 고급의 문화를 일구던 가나안 부족들은 자신들의 농경 생활을 지켜주는 신이 바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의 도움으로 풍작을 이루게 되고 그 결과 인심도 넉넉해지고 예술적인 것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부와 예술과 종교라는 것을 성(性)과 관계된 것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종족 번성이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많이 생산하고 자식을 많이 낳는 일에 가나안 인들은 집착하였습니다. 풍요와 성적 쾌락은 그들에게 생존이 달려 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저하게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문화민족인 가나안 족속과 관계를 맺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가 그들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셨으면서도 그것을 실제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민족인 가나안인의 종교와 문화를 멀리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부와 성은 생존의 필수요소이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로 취급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피조물의 절대화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명령은 단지 이론적이거나 교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피조물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행위로부터 인간은 부패하고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자본이 절대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신의, 정의, 책임감, 도덕성, 윤리 같은 것은 맥을 못 추고 돈의 힘만 득세합니다. 종교들도 그것을 부추깁니다. 기독교도 긍정적 사고방식, 삼박자 구원, 청부론 등으로 사람들을 교묘하게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바로 이런 것을 질타하였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들의 필요에만 집중되고 하나님께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불법과 악행과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한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힘써 하나님을 알자!"고 호소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게 기본이고 최종 목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인식을 건너 뛸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믿음은 인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광신의 가장 핵심적인 잘못은 알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이비 이단의 신앙 행태가 있지만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단지 광적인 믿음만 있습니다. 호세아가 볼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역시 제사와 번제가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은 바알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하나님을 "알자"라고 말합니다.

호세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실제로는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인의 문제이고 한계입니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의 자기 함정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흡사 컴퓨터 조작법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는 보험회사 직원이 자기가 팔아야 할 보험 상품에 대한 정보를 꿰뚫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정보를 기술적으로 전달하는 약장수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인간이 안다는 것이 한계가 있으므로 인식보다 믿음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섭리에 있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게 하셨으므로 믿음이란 그 하나님을 더 풍성히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일 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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