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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능력-분에 넘치는 환대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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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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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높임과 대접 받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은 자신이 대접을 받는 것보다 남을 대접하는 것이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확대해석하면 남에게 대접 받는 것이 남을 대접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대접 받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분수에 맞는 대접을 주고받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대접을 하는 사람은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분수에 맞게 하면 될 것이고 대접을 받는 사람은 진정한 겸양지덕(謙讓之德)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겸양지덕은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고 대접을 받으셔야 할 분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칭찬과 존경과 대접과 높임을 받고도 겸손하면 덕이 되지만 교만하면 화가 됩니다. 칭찬과 대접과 높임을 받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기보다는 교만하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구나 돈이 많거나 학문이 깊거나 지위가 높거나 어떤 분야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칭찬과 존경과 대접과 높임을 받게 되면 더더욱 교만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우리가 사려 깊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칭찬과 존경과 높이는 것은 그 자체가 과장될 소지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를 칭찬하거나 존경하거나 높이는 것은 사실보다 상당히 과장되고 있음을 계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실제로는 존경하지 않으면서 존경하는 것처럼 할 수도 있고, 조금 존경하면서 많이 존경하는 것처럼 할 수도 있으며,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대접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는 믿는 자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수법입니다. 이 사탄의 수법은 남에게 대접을 받는 사람이나 대접하는 사람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대접을 하는 입장에서는 대접이 좀 분에 넘친들 무엇이 나쁠까 생각하겠지만 사탄은 바로 그런 것을 이용합니다.

독재자는 자기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분에 넘치는 환대를 베풉니다. 독재자의 그런 행동이 그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남자답게 보이기도 하고 의리가 있는 것으로 비치기도 하며 탁월한 리더십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뒷골목 깡패들의 수준과 스타일입니다. 깡패들은 동료가 어려움을 당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어려움에서 건져내 줍니다. 그래서 깡패들은 두목과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의리 또는 신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논리와 방법과 가치관이 경제계, 정치계, 학계, 예술계, 종교계까지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와 방법은 그 집단을 결속시키고 목적을 이루는 데는 기여할지 몰라도 사랑과 정의의 정신에 위배되어 공익을 해치게 됩니다. 정당정치를 비롯한 모든 정치가 나름대로 장점도 있지만 정치, 사회, 경제정의를 이루는데 늘 실패하는 것은 그와 같은 뒷골목 깡패 스타일과 가치관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는 누구나 거절하기가 어렵습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를 자기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에도 이 문제에 대한 경고가 여러 번 주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은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듣고 더욱 교만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베드로도 이런 종류의 위험에 직면하였습니다. 그가 요한과 같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을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와 요한은 매우 당황해하며 그 분에 넘치는 환대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분에 넘치는 환대를 형식적으로는 거절하며 실제적으로는 당연한 것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지도자는 이런 종류의 위험에 자주 직면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랬던 것처럼 바울과 바나바도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사람들이 그들을 신격화 하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 하며 소를 잡아 제사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바울과 바나바는 크게 놀라면서 그들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이런 헛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헛된 일” 이란 제우스신에게 제사하는 행위와 또는 사람을 신격화 하여 경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루스드라인들에게 신관(神觀)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헛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일이 몹시 어려웠다고 하였습니다. “겨우 무리를 말려” 헛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를 거절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을 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겨우'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하였습니다. "겨우"라는 말은 헬라말로는 몰리스(μόλις)인데 아주 어렵게, 힘들게 그들을 자제 시킬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이런 표현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정말 힘든 일은 위험한 환대였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인들의 잘못 되고 위험한 환대를 거절하고 만류하는 일이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바울은 이 경우에 두 가지 관점에서 그들의 행위를 금하였는데 첫째는 사람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는 회개하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절대 왕정에서는 나라 전체가 왕의 것이고 백성은 모두 왕의 종이기 때문에 왕은 법위에 군림하고 자신을 신격화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스스로 신처럼 행세했고, 로마의 황제들을 비롯하여 제국의 왕들이 그랬습니다. 일본의 천황도 루이 14세도 자신을 신격화 하였습니다. 이단들도 자신을 신격화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큰 교회 목회자에게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권력자들과 이단들 중에는 스스로를 신격화 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 의해서 신격화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이단이 아닌 이상 공공연하게 자신을 신격화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신격화 하거나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치부(置簿)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헤롯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베드로나 바울처럼 분에 넘치는 환대를 거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좋은 교훈이 되는 인물이 구약에 나오는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요즘으로 말하면 신학교 총장입니다. 그가 이웃 대국(大國) 아람 나라 국방부 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었습니다. 나아만은 미리 준비해 간 사례물품을 엘리사에게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결연한 태도로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고 나아만이 강권하자 “저가 고사”하였다고 합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를 거절하는 것은 이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신학교 총장이라면 신학교 운영을 책임진 사람입니다. 돌아다니면서 모금을 해야 합니다. 선지학교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침 받고 고맙고 감사해서 주는 사례와 선물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을 받는다고 아무도 문제 삼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혹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문제를 삼는다고 해도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능력입니다.

목사들은 큰 교회 부흥회나 헌신예배나 수련회 강사로 가는 것을 대단한 특권으로 여깁니다. 큰 교회 강사로 가면 작은 교회에서는 감히 어림도 없는 과분한 환대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큰 교회 목사가 신학교를 운영한다면 신학교 강의를 맡는 것도 큰 특혜로 기대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KAPC 37회 총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회의를 파행으로 몰아간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과 고함을 친 회원들 거의가 소위 큰 교회 특별 집회 강사로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거나, 신학교 수련회나 강의를 맡는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뒷이야기가 무성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분에 넘치는 환대가 얼마나 사람을 비열하게 하고 추하게 하며 몰상식하게 하는 가를 이번 총회에서 많은 총대 회원들이 목격한 셈이 되는 것이니 나름대로 큰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분에 넘치는 환대는 베풀지도 받지도 말아야 하고 기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분에 넘치는 눈빛조차도 불편해 하며 거절하였는데.... 이것이 참된 경건의 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행 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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