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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에 마음 쓰며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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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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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요즘 윤창중 성추행 사건으로 어수선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에 대한 기대와 평가도 온통 윤창중 사건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는 고려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일보와 KBS를 거쳐 세계일보에서 정치부장을 역임했고, 1999년 문화일보로 옮겨 논설위원과 논설실장으로 활동한 보수논객입니다. 지난 대선 때는 문재인과 안철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진보적인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로부터 상반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카멜레온 문재인을 논한다”, “안철수, 대통령 ‘감’부터 안 된다.”, “더러운 안철수”, “안철수는 간교한 인간”, “콘텐츠 없는 약장수”, 안철수가 문재인 지지를 선언한 것에 대해 “안철수가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애들 목소리로….”, “문재인은 속 좋은 척할 수밖에 없는 데릴사위의 전형적인 모습”, “이런 어린아이들이 대통령되겠다 나서는 대한민국의 수준" 등으로 비하하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문화일보 논설위원을 그만 두면서 어떤 경우에든 정치권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던 그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청와대 수석 대변인 임명을 수락하는 변으로 “박근혜 정권에 들어가 성공한 정권을 만드는 게 나의 책무”라고 했고, “나라를 위해, 그게 애국”이라면서 “지켜봐 달라. 결코 실망 시켜드리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혔던 그가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을 망쳐놓았습니다. 그가 말한 ‘성공한 정권’, ‘애국’이란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하기만 합니다.

재미 언론인 안치용씨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윤창중의 학력과 이력이 정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학력과 이력을 부풀리거나 허위 기재하는 것쯤은 들키지만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 일반화 된 듯합니다. 또한 윤창중이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을 수행하면서 자원봉사자 교포여대생을 성추행 한 일로 물의를 일으켜 놓고서도 피해 여성에게나 국민에게 사과 한 마디 없이 줄곧 변명만 늘어놓는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정의와 윤리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학력과 이력을 부풀리고, 가짜 학위를 받고, 공금을 유용하거나 횡령하고, 비자금을 조성하고, 외도와 성추행 하는 것쯤은 못하면 무능, 들키면 바보라는 것이 통념(通念)처럼 되어버린 듯합니다.

박사 학위 논문 표절로 지탄을 받고 있는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는 모든 엉터리 학위를 받은 목회자들의 본보기 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한국 목사들이 받은 학위의 90% 이상이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가짜 학위를 받은 이들은 오정현 목사 사건을 지켜보면서 불똥이 자기에게도 튈까 마음 속으로 긴장을 했을 테고,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도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도 들키지 않은 이들을 마음 조이게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의 경우는 공금을 횡령했기 때문에 사회법에 고발이 되어 처벌을 받았지만, 전병욱 목사나 오정현 목사의 경우는 사회법에 고발되지 않았고 교회법으로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는 불법과 거짓과 사기와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당사자는 물론이고 윗사람까지 처벌을 받고 책임을 지는데 교회는 사회정의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KAPC 교단 안에도 차마 입에 담기조차 더러운 윤리적 죄를 짓고도 마치 가기가 의로운 양 다른 이들을 사회 법정에 고발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윤창중의 태도로 보아, 애국 한 번 하려고 했는데 사소한 일(?)로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그보다 더 파렴치한 죄를 지은 목회자의 태도는 윤창중보다 심합니다. 가짜 학위를 취득하고, 학위와 이력을 속이고, 거짓말은 다반사고, 성추행에다 공금횡령까지 하면서 설교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능력인지 모를 일이고 그를 두둔하고 지지하는 인사들의 언행 또한 가관입니다.

예레미야는 조국이 지리멸렬 되는 역사의 현장을 목도한 선지자입니다. 바벨론은 당시 유대 왕이었던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을 처형시키고 그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어 쇠사슬로 묶어서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질병에 걸려 죽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남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지식인과 기술자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 지역에는 주로 하층민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우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조국의 몰락만이 예레미야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도살당하러 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그에게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선지자들도 그를 비판하였습니다. 하나냐가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하나냐는 백성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하였습니다. 2년 안에 모든 것이 원상복구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원하시되 지금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실 날을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은 자신에게 살해의 위험을 몰고 오는 행위였습니다. 그 메시야는 그 나라를 지혜롭게 다스리고,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행할 일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엇일까요? 불의와 반대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쉽게 생각하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질서입니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정의와 공의를 외쳤습니다. 마지막 선지자이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도 그에게 몰려나온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따라서 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부른 찬송에도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눅 1:52, 53)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정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불법한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불의가 예수님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죄의 능력인 죽음을 부활로 정복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바로 궁극적인 정의의 실현입니다. 죽음의 극복보다 더 큰 정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유다에는 정의도 공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유다가 망한 이유입니다. 정의와 공의는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일입니다. 메시야만이 정의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린다면 당연히 그가 행하실 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볼 수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마땅히 그 메시야가 이루실 정의와 공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렘 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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