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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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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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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因果應報)란 사람의 행위의 선악에 대한 결과를 반듯이 후에 받게 된다는 말로, 죄 값을 치른다는 개념으로 쓰이는 한자성어이자 불교에서 유입된 불교용어입니다. 일상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는 일상적인 용법에 비해 상당히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불교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윤회의 작동원리이자 그것의 원동력이 되는 업보(業報)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전생에서 지은 죄에 따라 내생의 외모나 고난 등이 결정된다는 것이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현생에서 참회하고 덕을 쌓아 업을 없애면 그 또한 인과응보에 따라 해탈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과응보는 인간이 자신을 절제함과 동시에 늘 선한 일을 하여야 하며 또한 자기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교윤리의 기본이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가 비구들에게 네 가지 과보에 대해 가르치기를, “세상에는 네 가지 형태로 과보를 받는 법이 있다. 현재는 즐겁지만 미래는 괴로운 법, 현재는 괴롭지만 미래는 즐거운 법, 현재도 괴롭고 미래도 괴로운 법, 현재도 즐겁고 미래도 즐거운 법이 그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보의 네 가지 법칙을 가지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으나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과응보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서 순환적 시간관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이 윤리적 당위를 위해서 가설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설정한 것처럼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위해서 순환적 시간관에서 윤회를 설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나 힌두교나 유교의 가르침에는 인과응보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가 한 악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보응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생겨난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성어가 많습니다. 사필귀정, 권선징악, 자승자박, 종두득두 같은 한자 성어들은 모두 인과응보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독교인들도 거부감 없이 사용합니다.

성경도 어느 정도는 인간이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사랑과 용서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은혜의 교리를 가장 심각하게 왜곡한 사상이 바로 율법주의인데, 이는 곧 은혜를 모르는 인과응보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 모두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거운 짐입니다. 그것이 무거운 짐인 것은 인간의 능력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고 쉬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서로와의 관계에서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돌보고 관리해야 하는 것은 창조명령으로 주어진 책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그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 책임을 감당할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인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이방 종교나 사상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아서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죄 지은 인간을 용서 하시는 분입니다. 대가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고 당신 자신이 친히 대가를 치루시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경건하고 가장 겸손한 왕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을 제일 위대한 왕으로 생각합니다. 다윗이 여러 면에서 뛰어난 점이 있지만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그의 회개하는 모습이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죄질이 나쁜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만큼 악질적인 죄를 지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부하가 전쟁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에 왕의 권위를 이용하여 그의 아내와 간통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그를 속이고 고의적으로 그를 결렬한 전장으로 몰아넣어 전사하게 하였습니다. 나쁜 짓을 해 놓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더 나쁜 짓을 계속합니다. 그러면서 속이고 거짓말 하고 또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다윗은 전혀 죄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의 죄를 지적하는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노발대발 한 것을 보면 그가 자기의 죄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죄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책을 느끼면 계속 죄를 짓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죄책을 느끼면서도 죄에 끌려가기도 하지만 대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죄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죄를 짓습니다.

가끔 정치인들이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인용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말을 하는데, 신기한 것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온갖 죄를 다 지어 놓고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은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나쁜 짓을 하면서 일부러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 방어기재라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 중에도 그런 심리 작용으로 조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안 듣고 안 보고 무관심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양심이 깨끗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합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지적을 받자 즉각 회개한 것입니다. 다윗의 회개는 사울과 같은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탕자처럼,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그러면서도 “아버지여!”라고 하였듯이, 다윗은 그런 태도로 회개하였습니다. 시편 51편은 그의 회개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마치 자기의 옷이 오물로 뒤범벅이 된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심정적인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가 그 죄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스러워했고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한 순간도 그 죄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죄책은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어 그를 못살게 괴롭혔습니다.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Napalm bomb)이라는 폭탄이 있었습니다. 젤리 형태로 된 폭탄인데 비행기에서 뿌리면 나무나 사람에게 달라붙어 불타는 폭탄입니다. 그 불은 아무리 꺼려해도 꺼지지 않습니다. 물로서는 끌 수 없는 불입니다. 그 불의 온도가 900-1,300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사람은 물론 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우는 폭탄입니다. 그 불은 산소를 너무 많이 태우기 때문에 직접 불에 닿지 않아도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질식사 하게 됩니다. 6.25 때 그 폭탄이 몸에 달라붙어 불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폭탄의 별명이 sticky fire인데, 너무 나쁜 폭탄이라서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시편 51편을 읽어보면 다윗은 마치 죄가 그와 같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끄고 싶어도 꺼지지 않고,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죄책이란 사람을 참으로 비참하게 합니다. 다윗은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해야 할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까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어달립니다.

기독교는 죄 사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사야는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고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기억도 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고발한 잘못된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왜곡한 회개지만, 인간은 행위가 완전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 받아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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