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와 신학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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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6-01-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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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80년경에 살았던 희랍 철학자 제노파네스(Xenophanes)는 “말이 신을 그린다면 말처럼 그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신이란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뜻도 되고, 또한 사람이 신에 대해 아무리 잘 생각을 해도 의인화 정도를 넘어가지 못한다는 뜻도 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경험과 논리를 초월한 상상이란 거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식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론적 분석이나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어야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계시의 책입니다.
히브리서 1:1-2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고, 최종적으로는 아들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계시를 통하여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성령님이 오신 것도 결국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비록 계시의 책이지만 믿고 나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안셀름이라는 분은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믿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경 계시에 대해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도 말해줍니다. 어떤 의미로는 성경은 무조건 믿는 책이 아니고 기록된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며 배워야 할 책입니다.
성경 가운데는 사람이 이성으로 이해하기에 서로 상반되는 듯한 주장과 가르침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 더욱 하나님을 잘 알아가고 잘 섬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대도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고 또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은 전혀 이론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은 성경을 어떻게 배우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이 처음 복음을 이방에 전했던 때는 복음을 이론화 할 필요가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이후 속사도 시대, 즉 사도들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던 시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이론적이거나 신학적인 책이 아닙니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이론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나 인간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희랍 철학은 이론적입니다. 철학은“사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 물음에 대해 이론적인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질문이 없고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창조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존재라고만 합니다. 더 이상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론적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이론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성경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또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나 복음 전도자들도 복음을 전할 때 이론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울이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이론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요, 그곳 시민들은 종교심이 많고 또한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이라서 바울은 그런 상황을 감안하고 그 상황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하여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를 전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행 17:16-17절에 보면 바울은 회당에서도 시장에서도 날마다 여러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덴 사람들은 바울과 변론하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바울이 어느 곳에 가든지 전도하여 그 열매로 교회가 세워졌는데 아덴에 만은 교회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기독교는 이론적으로 전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는 하나의 본보기도 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이 아덴에서는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유식한(?) 말로 복음을 전하고 이방 종교의 헛됨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의 결신자가 있었으나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아덴에서 실패한 바울은 고린도로 갑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고전 1: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말씀은 다분히 아덴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짐작됩니다. 그리고 고전 2:1-5절을 보면 바울이 전도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전도할 때나 여러 서신을 기록할 때 이론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정을 말할 때조차 이론이나 교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찬송하리로다.”(엡 1:3-6절)라는 감격적 찬송으로 선택과 예정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대할 때“찬송하리로다.”라는 감격적 찬송으로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고, 최종적으로는 아들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계시를 통하여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것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성령님이 오신 것도 결국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비록 계시의 책이지만 믿고 나면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안셀름이라는 분은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믿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경 계시에 대해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도 말해줍니다. 어떤 의미로는 성경은 무조건 믿는 책이 아니고 기록된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며 배워야 할 책입니다.
성경 가운데는 사람이 이성으로 이해하기에 서로 상반되는 듯한 주장과 가르침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 더욱 하나님을 잘 알아가고 잘 섬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대도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고 또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은 전혀 이론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은 성경을 어떻게 배우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이 처음 복음을 이방에 전했던 때는 복음을 이론화 할 필요가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이후 속사도 시대, 즉 사도들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던 시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이론적이거나 신학적인 책이 아닙니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이론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나 인간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희랍 철학은 이론적입니다. 철학은“사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 물음에 대해 이론적인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질문이 없고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창조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존재라고만 합니다. 더 이상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론적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이론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성경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또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나 복음 전도자들도 복음을 전할 때 이론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울이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이론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요, 그곳 시민들은 종교심이 많고 또한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이라서 바울은 그런 상황을 감안하고 그 상황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하여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를 전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행 17:16-17절에 보면 바울은 회당에서도 시장에서도 날마다 여러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덴 사람들은 바울과 변론하는 것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바울이 어느 곳에 가든지 전도하여 그 열매로 교회가 세워졌는데 아덴에 만은 교회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기독교는 이론적으로 전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는 하나의 본보기도 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이 아덴에서는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유식한(?) 말로 복음을 전하고 이방 종교의 헛됨을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의 결신자가 있었으나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아덴에서 실패한 바울은 고린도로 갑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고전 1: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말씀은 다분히 아덴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짐작됩니다. 그리고 고전 2:1-5절을 보면 바울이 전도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전도할 때나 여러 서신을 기록할 때 이론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정을 말할 때조차 이론이나 교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찬송하리로다.”(엡 1:3-6절)라는 감격적 찬송으로 선택과 예정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대할 때“찬송하리로다.”라는 감격적 찬송으로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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