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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해 불행한 사람이 없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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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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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경제성장의 지표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실업률이 동반상승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가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자는 더 가난하게 되는 소위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현상이 심화되면 결국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함께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실업자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 이곳 미국 정부도 실업률이 상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실업률의 상승이란 직장을 잃고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소비가 줄어들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소비가 줄어들면 공장에서 생산을 줄여야 하고, 그렇게 되면 문을 닫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 결과 부익부의 특혜를 누리던 자들까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아직은 경제시장의 글로벌화로 소비의 수요가 지구촌 곳곳에 남아 있어 생산기업의 성장이 지속되고 있지만 머지않아 성장은 한계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걱정하는 몇몇 의식 있는 사람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안들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성장 신화를 좇아가는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인 듯합니다. 자본주의가 낳은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사회적 병리현상을 낳고 있습니다. 부익부의 사람들은 상승하는 경제지표에 즐거워하고 감사(?)하겠지만 빈익빈의 사람들은 이 감사의 계절에도 감사의 조건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자신의 능력을 비웃는 제도적 모순의 피해자가 되어 냉소적이 되고 마치 불평만 일삼고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습니다. 좋은 사회는 감사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이고 모두가 함께 감사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부익부빈익빈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긴장과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 되고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인하여 모두가 불행하게 되고 맙니다.

올해도 감사의 계절에 많은 사람들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풍성한 식탁에서 가족끼리 모여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감사는 무조건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좀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가령 도적질 한 돈으로 감사헌금을 한다고 하면 그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도적질한 것으로 감사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안심하면 안 됩니다. 나 때문에 부당하게 경제적 손해를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드리는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매우 불행한 상태에 있는 데 나는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도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천하 모든 사람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소돔성이 심판에 직면하자 아브라함은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나의 기쁨과 감사는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도 그것이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조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드렸지만 어떤 제물은 열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 4:5절에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cf.삼상 15:21-23, 사 1:11,13,14; 렘 6:20; 암 5:21,22; 미 6:6-8절). 나 자신이 감사하고 기뻐한다고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불행을 다 책임져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과 함께 감사해야하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감사해야 하고, 이웃과 함께 감사해야하며, 직장동료와 고용인과 고용주가 함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상호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내가 약하면 다른 사람도 약하게 되고, 내가 강하면 다른 사람도 강하게 됩니다. 내가 낙심하면 다른 이들도 낙심하고, 내가 기뻐하고 감사하면 다른 사람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용서하면 다른 사람도 용서합니다.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때로는 한 사람 때문에 목사가 낙심이 되고. 때로는 한 사람 때문에 용기를 얻습니다. 목사와 교우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교우 서로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말 한 마디가 격려가 되어 용기를 얻게 되기도 하고, 무심코 뱉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에 꽂히게도 됩니다. 합당한 감사란 모두 함께 드릴 수 있는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약속하실 때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가난한 자들에게 주신 복 같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가난한 자가 없어지는 것은 가난한 자가 죽어서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부요하게 된다는 것이니까 당연히 가난한 자의 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의 복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이 세상 나라의 복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가 있어도 나만 부요하면 그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하심으로서 내가 부요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요하게 됨으로 성취되는 복임을 생각할 때 감사도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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