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 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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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일 ㆍ2004-03-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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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1월 중순부터 치료 코디네이터(Therapy Coordinator)로 승진하여 출근시간이 1시간 당겨졌다. 이전에는 9시 출근과 5시 퇴근제(9-5 Shift)이었는데, 8시부터 4시까지로 근무시간이 조절되었다. 아침에는 많은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 마음이 분주했다.
특히, 약간 늦게 출근하다가 종잡을 수 없는 교통혼잡 상황에 걸리면 아침부터 김을 다 빼버리게 된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일과를 계획하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니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리고 스태프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바로 업무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이와 함께 항상 7시 이전에 집을 나서게 된다.
그 해 12월 초 한 아침이었다. 그 날 아침도 평상시와 같이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로 서둘렀다. 집사람은 이미 5시 45분에 맨해튼 직장(병원)으로 떠났다. 수술이 7시에 시작되기에 6시 45분에 도착하여 간호원으로서 수술 채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 날은 아이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집에서 7시 10분에 떠나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으로 그다지 시간 개념이 없는 듯하였다. 그리고 아이의 학교는 1분 거리이었고 더구나 7시 30분에 특별학급이 시작되니 그렇게 재촉할 여유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없었다. 그러나 13세가 될 때까지는 혼자 집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학교 앞에 도착하니, 7시 15분! 빨리 서두를 것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렇게 늦은 이유가 뭐냐고 하면서 차안에서 다그치며 고함을 질렀다. 학교 앞에 아이를 떨어뜨리면서 고함을 다시 한 번 더 질렀다. 아이는 기에 죽은 듯, 그리고 미안한 듯,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학교 정문을 힘없이 걸어갔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3-4분 동안 화냈던 마음이 갑자기 죄의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탓에 나의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눈엔 눈물이 글썽임을 느꼈다. 운전을 하면서 직장 생각보다는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생각으로 지배되어, 막히는 도로에도 불구하고 언제 직장에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오전의 중요한 업무들을 처리하고 마치니 약 11시 반이 되었다. 아이의 학교에 전화를 했다. 사무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그 직원에게 부탁했다. 지금 팩스를 한 장 할 터이니 아이에게 전달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임을 강조하며 번거롭게 함에 미안함을 표현했다.
편지에는 ‘이삭, 아빠가 아침에 화를 내어서 미안해. 조금 늦었지만 오후 시간 즐겁게 보내고, 집에 도착하는 대로 아빠에게 전화해. 미안해!’라고 썼다. 학교에서 팩스를 받았는지, 그리고 아이에게 전달이 되었는가를 확인하고는 마음이 한층 가벼워짐을 느꼈다.
오후 3시 30분!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저 이삭이에요!”라고 했다. 아침보다는 생기가 많이 돌아온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감정 조절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Are you Okay?”와 “I‘m S-o-o-orry!”를 반복했다. 아이도 “아빠 미안해요”라고 대답했다. 당장 집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아직도 그 날의 일이 너무 생생하게 남는다. 어차피 일어난 일을 왜 그렇게 화를 내었는지…. 그 날 학교에서 아빠의 무서운 모습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안타깝고 후회가 되었던 것이었다. 부디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랐고 치유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특히, 약간 늦게 출근하다가 종잡을 수 없는 교통혼잡 상황에 걸리면 아침부터 김을 다 빼버리게 된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일과를 계획하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니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리고 스태프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바로 업무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이와 함께 항상 7시 이전에 집을 나서게 된다.
그 해 12월 초 한 아침이었다. 그 날 아침도 평상시와 같이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로 서둘렀다. 집사람은 이미 5시 45분에 맨해튼 직장(병원)으로 떠났다. 수술이 7시에 시작되기에 6시 45분에 도착하여 간호원으로서 수술 채비를 갖추어야 했다.
그 날은 아이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집에서 7시 10분에 떠나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으로 그다지 시간 개념이 없는 듯하였다. 그리고 아이의 학교는 1분 거리이었고 더구나 7시 30분에 특별학급이 시작되니 그렇게 재촉할 여유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없었다. 그러나 13세가 될 때까지는 혼자 집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학교 앞에 도착하니, 7시 15분! 빨리 서두를 것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렇게 늦은 이유가 뭐냐고 하면서 차안에서 다그치며 고함을 질렀다. 학교 앞에 아이를 떨어뜨리면서 고함을 다시 한 번 더 질렀다. 아이는 기에 죽은 듯, 그리고 미안한 듯,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학교 정문을 힘없이 걸어갔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3-4분 동안 화냈던 마음이 갑자기 죄의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탓에 나의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눈엔 눈물이 글썽임을 느꼈다. 운전을 하면서 직장 생각보다는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생각으로 지배되어, 막히는 도로에도 불구하고 언제 직장에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오전의 중요한 업무들을 처리하고 마치니 약 11시 반이 되었다. 아이의 학교에 전화를 했다. 사무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그 직원에게 부탁했다. 지금 팩스를 한 장 할 터이니 아이에게 전달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임을 강조하며 번거롭게 함에 미안함을 표현했다.
편지에는 ‘이삭, 아빠가 아침에 화를 내어서 미안해. 조금 늦었지만 오후 시간 즐겁게 보내고, 집에 도착하는 대로 아빠에게 전화해. 미안해!’라고 썼다. 학교에서 팩스를 받았는지, 그리고 아이에게 전달이 되었는가를 확인하고는 마음이 한층 가벼워짐을 느꼈다.
오후 3시 30분!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저 이삭이에요!”라고 했다. 아침보다는 생기가 많이 돌아온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감정 조절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Are you Okay?”와 “I‘m S-o-o-orry!”를 반복했다. 아이도 “아빠 미안해요”라고 대답했다. 당장 집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아직도 그 날의 일이 너무 생생하게 남는다. 어차피 일어난 일을 왜 그렇게 화를 내었는지…. 그 날 학교에서 아빠의 무서운 모습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안타깝고 후회가 되었던 것이었다. 부디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랐고 치유될 수 있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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