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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방종적 쾌락을 억제하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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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6-04-18

본문

영지주의는 인간을 세 계급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영적 계급(spiritual man)이고, 둘째는 정신적 계급(semi-spiritual)이며, 셋째는 물질적 계급(material man)입니다. 영적 계급은 최고의 계급이고, 둘째는 보통신자의 계급이고, 셋째는 물질적 계급으로 구원 받지 못하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최고의 계급인 영적 계급에 속한 자들만이 구원의 지식, 즉 영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에 나타난 신비적 이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르칩니다. 즉 영적인 것은 선하고 고상하며 물질은 더럽고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가치관은 인간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여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적 일에만 몰두하고 금욕적 생활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영혼만 더럽히지 않으면 육체는 아무런 행동을 해도 영혼이 타락을 하거나 악하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윤리적 타락을 정당화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초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어서 바울 사도가 꾸짖고 있습니다(고전 5:1,2절).

고린도 교회에서 어떤 자식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여러 명의 아내를 얻었다는 전제가 된 말씀이고 또한 아버지가 자기의 아내 중 한 여자를 자기 아들에게 내어주었다는 당시의 윤리적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교회의 성도가 그런 행위를 해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매우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비윤리적인 행위가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신앙적으로도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초대 고린도교회의 윤리적인 형편이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미국에서도 교회 안에서의 동성애가 문제시 되어오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부와 개신교 목회자들 중에도 동성애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문제가 표면화 된 것은 이제 더 이상 쉬쉬할 문제가 아닌 상황임을 의미합니다. 많은 가톨릭의 신부들이 미성년자를 상대로 나쁜 짓을 한 일들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에서도 동성애 문제가 총회 적으로 받아들여졌다가 다시 취소되는 소동을 벌였습니다. 동성애 문제가 총회에서 받아들여질 만큼 동성애를 지지하는 목회자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미국은 아직 기독교가 보수적이라서 이정도이지 유럽에서는 기독교 신자들과 목회자들의 동성애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동성애가 어쩌고저쩌고 할 처지가 아닙니다. 동성애는 이미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문제 삼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한 생각이라는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결혼 전에 미리 한 번 살아보고 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얼굴도 모르고 결혼을 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다음에 시대가 좀 개화되자 연애도 안 해보고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고 했는데 요즘은 살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오래 교제를 해도 살아보기 전에는 서로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살아보고 결혼해야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서로를 잘 안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높은 이혼율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살아보면 힘들고, 힘들면 헤어지는 것이 다반사니까 아예 혼자 사는 경우도 많아집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쾌락을 추구하는 악한 욕망이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편리를 추구하고, 자기에게 좋은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가치관의 상실 때문입니다. 현대정신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포스트모더니즘이 바로 그 주범입니다. 이런 시대정신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좋은 대로 생각하고 자기 좋은 식대로 살도록 합니다. 이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타락한 인간의 악한 욕망을 통제하던 이성이 그 통제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소피스트들과 그 후 에피쿠로스 철학이, 19세기의 공리주의가 그리고 오늘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사람들로 하여금 쾌락을 추구하도록 이론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습니다. 쾌락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윤리적 타락을 가져오고 윤리적 타락은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이성의 권위와 종교적 신앙까지도 상대화 해버린 이 시대정신은 윤리적 삶의 고귀함을 장려할 근거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염려했던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불란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윤리와 도덕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의 신앙이 방종적 쾌락과 윤리적 타락을 억제하는 부가적 효과가 탁월함을 역설하였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2-3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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