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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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5-08-3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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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문화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문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여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의도하지 않지만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어떤 욕구에 따라 행동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문화입니다.
세속적인 문화를 기독교적인 문화로 바꾸자고 하여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그 결과 기독교 문화가 만들어지고,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으면 기독교 문화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문화를 만드는 것은 짐승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짐승은 어떤 조건 아래서도 문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필요조건에서 문화적으로 반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절대 필요조건이란 무엇일까요? 네델란드의 역사학자 하이징가는 문화를 유희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그는 유희에서 문화 창조의 조건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유희란 인간의 절실한 필요라기보다는 그저 재미로 한 번 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저 한 번 해보고 싶은 욕구도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화는 인간의 절실한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가치 있는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적 인간관에서 생각한다면 인간에게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한 번 해보고 싶은 정도의 욕구라는 것은 그리 선한 욕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 역시 인간에게 선한 기여를 하는 문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화가 인간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고통을 제거하거나 혹은 고통을 덜려는 욕구와 행동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고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그저 재미로 한 번 해보는 시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농업을 시작하고 집을 짓는 데는 보다 심각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 심각한 이유의 밑바닥에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기하학조차도 나일 강의 범람 때문에 땅의 경계를 측량해야 하는 필요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은 스스로를 극복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고통이 다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고통이 없었더라면 그것을 제거하려는 자극도 받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의 제거와 완화를 요구함으로 문화의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그러고 보면 고통은 인간 문화를 발전하게 하는 양질의 에너지원이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양심으로 생각할 때 악을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의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을 즐기고 세속과 짝하는 가치관과 정신으로는 기독교 문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악을 고통으로 느끼는 신앙 양심의 욕구가 절실할 때 비로소 기독교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과 조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 아모스 5:15절 -
세속적인 문화를 기독교적인 문화로 바꾸자고 하여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그 결과 기독교 문화가 만들어지고,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살지 않으면 기독교 문화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문화를 만드는 것은 짐승과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짐승은 어떤 조건 아래서도 문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필요조건에서 문화적으로 반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절대 필요조건이란 무엇일까요? 네델란드의 역사학자 하이징가는 문화를 유희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그는 유희에서 문화 창조의 조건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유희란 인간의 절실한 필요라기보다는 그저 재미로 한 번 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저 한 번 해보고 싶은 욕구도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화는 인간의 절실한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가치 있는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적 인간관에서 생각한다면 인간에게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한 번 해보고 싶은 정도의 욕구라는 것은 그리 선한 욕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화 역시 인간에게 선한 기여를 하는 문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화가 인간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고통을 제거하거나 혹은 고통을 덜려는 욕구와 행동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고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그저 재미로 한 번 해보는 시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농업을 시작하고 집을 짓는 데는 보다 심각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 심각한 이유의 밑바닥에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기하학조차도 나일 강의 범람 때문에 땅의 경계를 측량해야 하는 필요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은 스스로를 극복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고통이 다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고통이 없었더라면 그것을 제거하려는 자극도 받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의 제거와 완화를 요구함으로 문화의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그러고 보면 고통은 인간 문화를 발전하게 하는 양질의 에너지원이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양심으로 생각할 때 악을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의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을 즐기고 세속과 짝하는 가치관과 정신으로는 기독교 문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악을 고통으로 느끼는 신앙 양심의 욕구가 절실할 때 비로소 기독교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과 조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 아모스 5:1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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