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을 극복하는 기독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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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5-08-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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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에 보면 가난한 흥부는 아이가 스물다섯 명이나 됩니다. 입힐 옷이 없어서 멍석 한 장에 스물다섯개의 구멍을 뚫어서 목만 끼우고 꿰매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한 놈이 뒷간엘 가면 다른 스물네 명도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 꼴을 보고 흥부는 “다 너희들 타고난 팔자다”라고 합니다. 그 처절한 가난을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면 제비 다리 고쳐주기 전에 그 벅찬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흥부네 가족은 동반자살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말에 이 ‘팔자’라는 것은 운명과도 상통하는 말입니다.
옛 희랍인들도 운명 앞에는 꼼짝 못하였습니다. 희랍의 최고의 신 제우스도 운명에게는 일체 거역을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팔자라는 것, 곧 운명은 긴장과 불안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꿈 해몽을 보면 불길한 꿈을 길몽이라고 하고, 좋은 꿈을 오히려 흉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긴장을 중화시켰습니다. 꿈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을 주우면 불길하고, 아이를 낳으려 갈 때 상주나 장례행렬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이런 것들도 있습니다. 택시가 아침 첫 손님으로 안경 낀 사람을 태우지 않고, 다방에서 차 안 마시고 나가는 첫 손님이 있으면 문전에다 소금을 뿌리고, 차 앞을 여자가 횡단하면 침을 세 번 뱉고, 식사 중에 수저가 부러지면 간장을 떠 마시고, 길 가다가 머리에 새똥이 떨어지면 계획한 일이 안 될 징조이고, 장님이 극장 앞을 지나가면 소금을 뿌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것을 수집해보니까 무려 5,430여 가지나 된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습관과 문화를 피하여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자기 꿈이 실현 안 되면 체념과 원망과 자학을 하면서 폐쇄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들의 습관과 의식들을 그냥 재미있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고방식은 모든 일을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탓을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 의식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정치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져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운명론적 사고방식은 책임의식을 약화시킵니다. 운명론이 지배적인 나라는 대게 윤리와 도덕의식이 약합니다.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이 기독교인에게 끼친 영향도 큽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사회정의와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약한 이유도 바로 운명론적인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마치 운명론 비슷한 것으로 이해를 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돌립니다. 적극적으로 나쁜 짓을 해 놓고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지시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시고 간섭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설교를 해야 하는 데도 설교 준비를 안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면 전하고 안 주시면 안 전하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설교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수백 명의 청중들이 모여서 말씀을 기다리는데 설교자가 강대상에 나타나서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께서 말씀을 안 주신다고 하면서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설교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아주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대단히 신령한 설교자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이런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으면 뭔가 되겠지 생각하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노력도 안 합니다. 심지어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마치 불신앙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정을 가르치지만 운명론은 배격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예정을 근거로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 에스겔 36:37절 -
옛 희랍인들도 운명 앞에는 꼼짝 못하였습니다. 희랍의 최고의 신 제우스도 운명에게는 일체 거역을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팔자라는 것, 곧 운명은 긴장과 불안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꿈 해몽을 보면 불길한 꿈을 길몽이라고 하고, 좋은 꿈을 오히려 흉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긴장을 중화시켰습니다. 꿈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을 주우면 불길하고, 아이를 낳으려 갈 때 상주나 장례행렬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이런 것들도 있습니다. 택시가 아침 첫 손님으로 안경 낀 사람을 태우지 않고, 다방에서 차 안 마시고 나가는 첫 손님이 있으면 문전에다 소금을 뿌리고, 차 앞을 여자가 횡단하면 침을 세 번 뱉고, 식사 중에 수저가 부러지면 간장을 떠 마시고, 길 가다가 머리에 새똥이 떨어지면 계획한 일이 안 될 징조이고, 장님이 극장 앞을 지나가면 소금을 뿌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것을 수집해보니까 무려 5,430여 가지나 된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습관과 문화를 피하여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자기 꿈이 실현 안 되면 체념과 원망과 자학을 하면서 폐쇄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들의 습관과 의식들을 그냥 재미있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고방식은 모든 일을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탓을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 의식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정치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져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운명론적 사고방식은 책임의식을 약화시킵니다. 운명론이 지배적인 나라는 대게 윤리와 도덕의식이 약합니다.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이 기독교인에게 끼친 영향도 큽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사회정의와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약한 이유도 바로 운명론적인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마치 운명론 비슷한 것으로 이해를 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돌립니다. 적극적으로 나쁜 짓을 해 놓고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지시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시고 간섭 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설교를 해야 하는 데도 설교 준비를 안 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면 전하고 안 주시면 안 전하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설교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수백 명의 청중들이 모여서 말씀을 기다리는데 설교자가 강대상에 나타나서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께서 말씀을 안 주신다고 하면서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설교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아주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대단히 신령한 설교자 같습니다.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이런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으면 뭔가 되겠지 생각하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노력도 안 합니다. 심지어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마치 불신앙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정을 가르치지만 운명론은 배격합니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예정을 근거로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 에스겔 36:3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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