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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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15-12-2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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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면 날마다 1년이면 12달,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는 곳,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부드럽게 늘 출렁거리는 푸른 바다, 각 곳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로 하루를 여닫는 곳, 아름다운 섬 하와이를 떠나 사계절이 분명하다는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처음 맞이하는 가을, 뒤뜰에는 노란 낙엽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겨우살이를 위한 열매를 모으려는 것일까? 똥그란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이 나무 저 나무로 오르락거리는 다람쥐의 빠른 발걸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부산스럽다.
어찌 다람쥐뿐이랴? 모든 동식물에 넉넉한 품을 제공하며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끌어안던 푸른 나무도 이제 벌거벗기 시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은 늘 향기롭고 늘 관용을 베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냉혹하리만큼 모질게 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생(生)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나 봄일 수 없고 언제까지나 여름일 수 없는 인생…, 가을을 지나야 하는 인생이라면, 나는 과연 다가올 겨울 준비를 얼마나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얼마 전, 젊은 영혼의 열기가 한창 뜨겁게 달궈지던 ‘바타클랑’ 극장, 생명의 향기로 충만했어야 할 장소가 테러범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하였고 아무 죄 없는 생명들이 무참히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늘 봄이며, 항상 여름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겨울, 그 다음에 가서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날 그 시간에 참혹한 겨울이 올 것임을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근면(diligent)한 삶을 택하지 않았을까? 인생의 삶이란 너무 폐쇄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관용(똘레랑스,tolerance)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오늘 따사로운 햇살이 생(生)의 뜨락에 쏟아질 때는 받아드리고 내일 모진 눈보라가 몰아칠 것도 예상하면서 살아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조금 더 나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실과를 거두어 들일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개중에는 많은 젊은이가 근면. 성실한 삶, 포용할 때는 포용하고 닫을 때는 닫고 최선의 길, 최상의 선택적 삶으로 잘 가꾸어 나가던 중, 어쩌다 그 광란의 장소를 찾게 되어 죽음을 맞게된 억울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연주한 록밴드의 실상을 알았다면 그들의 광란의 춤과 노래를 삶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을 것 같다. 죄악이 넘쳐나는 장소에 내 몸을 맡기는(관용?) 일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은 사탄을 찬양하고 사탄을 숭배하는 가수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근면, 성실한 청년들이 그곳에 참여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너무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우리 모두가 그토록 참혹한 일이 일어나게 된 동기나 이유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시점에 이른 듯하다. 프랑스 경찰과 정부가 힘을 합쳐 사건의 경위를 분석하고 조사한 결과, 구원론이 잘못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만행이었음이 만천하에 들어났고 그 끔찍한 현실에 전 세계인이 분노했다. 더 놀라운 것은 테러들 대다수가 시리아 피난민을 가장해서 들어온 IS요원이었다는 것이다. 피난민을 가장하고 들어온 테러단의 만행을 막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는 하겠지만 그들 테러리스트에게 강경책으로 대응하려다보니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순수한 난민들이란 것이 나를 화나게 한다.
미국의 911테러 사건, 이 경악할 참상을 지켜본 유럽에서는, 생각하기를 ‘미국이 매일 이라크를 공습하고 이슬람 국가들과 원수로 지내니까 저런 테러공격을 당하는구나, 우리는 이슬람에게 관용을 베풀자, 그들에게 잘 대해주자.’ 그 후부터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민자들에게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다. 그들의 종교도 그들의 사상도 물어보지 않은 채 다문화 그대로를 무조건 받아주기 시작했다. 그 똘레랑스(Tolerance) 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유럽으로 이주했다. 그들의 종교는 산아제한이란 것을 할 수 없고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된다. 그러니 그들은 자녀를 낳고, 낳고 또 낳았다. 유럽인구의 출산비율보다 여덟 배 아홉 배, 심지어 열 배가 넘었다.
프랑스는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탓에 이번 같은 사건이 터졌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슬람 교리에는 분명하게 자신들의 세력이 약할 땐 평화의 종교로 위장하고 있다가 세력이 커지면 ‘지하드’를 개시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리에는 “알라를 위해서는 그 반대자를 반드시 죽여라. 포교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 라는 말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어찌 되었건 유럽 사회에서 그동안은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으나 이슬람이 확산된 이후에 수많은 국가들이 이것이 프랑스 정부의 똘레랑스(Tolerance)정책의 부산물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 허둥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들(이슬람종교)의 교리의 포학성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무조건적 관용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각 나라 국경선의 문턱이 갑자기 높아진 것이 그것이다. 갑자기 이민 정책을 재검토하는 어리석음보다 처음부터 어떤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맞게 서로가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지 늦장 대응의 후유증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큰 피해가 아닐 수 없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고 하던 우리 선조님들의 지혜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건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신앙인)도 각성해야 한다.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 아름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으나 결코 가볍게 사용해서도 안되는 말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그 단어의 뜻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다가는 이번처럼 무시무시한 참사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리 모두 자각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와 살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 법률을 준수하고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질서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장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에 무조건적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은 자기 자신에게나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보다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엄격하게 잣대를 두고 성경의 기준으로 자신을 맞추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좁은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똘레랑스(관용, Tolerance)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현대 교회의 병폐요 폐단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지적일까? 현대는 신학자는 많으나 알고 있는 만큼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은 너무 적다. 왜 다른 사람의 신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특히 이단 사역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잘못은 덮어두고 다른 이의 신앙생활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짐을 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 천국 가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 앞에 설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대 기독교가 점점 하향하는 추세라며 염려하는 목소리는 높은데 “회개”를 외치는 사람은 적다. 초대교회는 달랐다. 다른 사람을 질책하고 비판하기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진실되게 살아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믿는 사람이 날로 늘어갔다. 진실한 성도,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되어 결국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더 나아가 내가 개혁되어야 전 세계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사다난하였던 이 한 해도 얼마남지 않았다. 지금껏 내 자신의 죄악에 대해, 게으름에 대해 관용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내 삶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바늘 도둑 같은 작은 죄라도 회개하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 모진 십자가 형벌을 감내하셨음을 잊지 말자.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나 자신의 죄를 관용하는 자, 남의 죄에만 관심이 많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장 미워하셨음도 기억하자. 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을 자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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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2015-12-28 17:10
96.xxx.163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 했습니다.
그는 종교가 권력화 하여 지배의 수단으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피지배자인 노동자를 현혹시키는 마약으로 본 건 계급투쟁으로 극복하지 못할 수단이 없을 때, 나약하게 종교를 믿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삼음을 비판 했지 종교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몇 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로 나중에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마르크스도 그의 영향을 받았기에 개신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전해지지만 그는 그의 계급투쟁을 상대적인 가난,
비교된 가난으로 치부하였기에
그의 사생활은 부를 지향한 자기 모순적인 생활이 되었습니다.
제가 마르크스 얘기를 함은 그를 사상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하면 마약처럼
신앙이 진리를 떠나서, 자기도취와 자기 의에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되어 방종에 빠지면 거짓을 일삼아 이런 분류의 사람들에게 예의나
예절, 도덕 윤리는 물론 인격파탄이 되어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릅니다.
멀리서 볼 것 없이 여기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종교가 권력 화된 시대는 종교가 착취의 수단이 되었고
늘 죄악 된 캄캄한 사회였고, 종교가 정치와 야합하면 신정정치가 되어
지배와 비지배자의 신분을 나누어 계급사회가 되어,
지배자는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로 피지배자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삼고, 더하여
신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자나 이런 자를 지도자로
옹호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악용하면 제정일치가 되어 아랍 여러 나라들이 이런 형태이고
더하여 극단주의자는 더 극단적 통치의 수단으로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니
평화가 있을 수 없고, 통치와 착취를 위한 수단의 종교는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이비, 이단의 수단이기도 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선교라는, 성전 건축이라는 구실 등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낮아진 직분이면서 높아진 계급의 상징이 되어
지배자의 위치에서 피지배자를 가르고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라는 종교의 종교인이 아니듯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인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그러움과 용서를 ‘관용’을 자기 욕심의 변명으로 삼은 지도자나
관용의 남용으로 죄까지 남용하는 교계와 교회의 사건은 오늘 어제 일이 아닙니다.
관용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면 교만입니다.
타인을 위한 관용이라도 절제되지 않은 관용은 죄를 기피하는 수단이 되어
죄에 대한 방관이 되어, 오만이 되어 죄 지은 자를 죄를 인간적인 관계로,
직분의 상하관계로 두둔하여 긍정의 착각을 갖게 하면
그 집단은 죄에 대하여 무디게 되어 신앙의 순결성을 잃어버림은 물론 자체적인 정화능력이
소멸됩니다.
별똥별님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면서
새로운 결단을 보는 듯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감싸주는 명분이 아니듯이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도로 분별된 사랑입니다.
추천합니다.
체르니
2016-01-04 11:16
220.xxx.174
안녕하세요.별사모님! 오랜만에 아멘넷에 들어와보니 역시 반가운 글이 보여서 남깁니다. 항상 일관되게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전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기자석
2016-01-04 09:30
24.xxx.182
아주 작은 죄라도 회개하자는 말씀....
네... 회개하겟습니다.
초생달
2016-01-02 19:39
218.xxx.203
별똥별님. 지상낙원 하와이 로부터 옮겼셨네요.
님께서 관촬하시는 사계절은 더욱 정서가 깊습니다.건강에지장은
없스신지요, 새해가밝아왔습니다.
이곳 서울의 기독교의 소식역시 걱정스러운점이많씀니다 마는
님께서 주님을향하신 뜨거운 믿음에 주님께서는 능히
굽어살펴주실것으로믿습니다.
새해에도 좋은 복음 많이 올려주셨으면합니다.
아멘넷 여러 어르시님과 이 종철 선생님에게 주님의 사랑이
덤뿍내려주시기를기원드립니다.
특히 이 종철 선생님에게는 많은 지도편달을 바라는바입니다.
누지문서
2015-12-30 10:44
173.xxx.79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 아름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으나 결코 가볍게 사용해서도 안되는 말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_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관용이란 겉모습을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교회를 흔드는데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사회뿐 아니라 교회와 가정에 까지 침투한 똘레랑스의 양상과
폐해는 우리가 알고있는 이상으로 거셉니다.
별똥별님 , 한 해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하늘에서 주시는 지혜로 아멘넷에 좋은 글들을
계속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2015-12-29 14:30
175.xxx.115
구구절절히 옳은 말씀입니다!
또한 아주 중요한 지적이시구요.
근자에 나타났던 끔찍한 말세의 징조인 인간의 잔악무도한 모습을 근본 원인부터 파헤쳐 믿음을 가진 우리 기독교인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지를, 회개해야 할 명분까지 잘 지적해 주심에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네요. 여러가지 일로 바쁘셔서 참여치 못하시다가 이 해가 지나기 전에 좋은 말씀으로 마무리를 장식해 주셔서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한 사건을 보시며 믿음으로까지 다각도로 깊이 생각하시는 것을 보고 고개가 숙여지며 존경스럽네요! 새해에도 이와같이 좋은 말씀 종종 올려주세요.~^^
별님, 주 안에서 연말 연시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샬롬!~
어찌 다람쥐뿐이랴? 모든 동식물에 넉넉한 품을 제공하며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끌어안던 푸른 나무도 이제 벌거벗기 시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은 늘 향기롭고 늘 관용을 베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냉혹하리만큼 모질게 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생(生)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나 봄일 수 없고 언제까지나 여름일 수 없는 인생…, 가을을 지나야 하는 인생이라면, 나는 과연 다가올 겨울 준비를 얼마나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얼마 전, 젊은 영혼의 열기가 한창 뜨겁게 달궈지던 ‘바타클랑’ 극장, 생명의 향기로 충만했어야 할 장소가 테러범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하였고 아무 죄 없는 생명들이 무참히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늘 봄이며, 항상 여름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겨울, 그 다음에 가서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날 그 시간에 참혹한 겨울이 올 것임을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근면(diligent)한 삶을 택하지 않았을까? 인생의 삶이란 너무 폐쇄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관용(똘레랑스,tolerance)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오늘 따사로운 햇살이 생(生)의 뜨락에 쏟아질 때는 받아드리고 내일 모진 눈보라가 몰아칠 것도 예상하면서 살아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조금 더 나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실과를 거두어 들일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개중에는 많은 젊은이가 근면. 성실한 삶, 포용할 때는 포용하고 닫을 때는 닫고 최선의 길, 최상의 선택적 삶으로 잘 가꾸어 나가던 중, 어쩌다 그 광란의 장소를 찾게 되어 죽음을 맞게된 억울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연주한 록밴드의 실상을 알았다면 그들의 광란의 춤과 노래를 삶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을 것 같다. 죄악이 넘쳐나는 장소에 내 몸을 맡기는(관용?) 일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은 사탄을 찬양하고 사탄을 숭배하는 가수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근면, 성실한 청년들이 그곳에 참여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너무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우리 모두가 그토록 참혹한 일이 일어나게 된 동기나 이유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시점에 이른 듯하다. 프랑스 경찰과 정부가 힘을 합쳐 사건의 경위를 분석하고 조사한 결과, 구원론이 잘못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만행이었음이 만천하에 들어났고 그 끔찍한 현실에 전 세계인이 분노했다. 더 놀라운 것은 테러들 대다수가 시리아 피난민을 가장해서 들어온 IS요원이었다는 것이다. 피난민을 가장하고 들어온 테러단의 만행을 막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는 하겠지만 그들 테러리스트에게 강경책으로 대응하려다보니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순수한 난민들이란 것이 나를 화나게 한다.
미국의 911테러 사건, 이 경악할 참상을 지켜본 유럽에서는, 생각하기를 ‘미국이 매일 이라크를 공습하고 이슬람 국가들과 원수로 지내니까 저런 테러공격을 당하는구나, 우리는 이슬람에게 관용을 베풀자, 그들에게 잘 대해주자.’ 그 후부터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민자들에게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다. 그들의 종교도 그들의 사상도 물어보지 않은 채 다문화 그대로를 무조건 받아주기 시작했다. 그 똘레랑스(Tolerance) 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유럽으로 이주했다. 그들의 종교는 산아제한이란 것을 할 수 없고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된다. 그러니 그들은 자녀를 낳고, 낳고 또 낳았다. 유럽인구의 출산비율보다 여덟 배 아홉 배, 심지어 열 배가 넘었다.
프랑스는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탓에 이번 같은 사건이 터졌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슬람 교리에는 분명하게 자신들의 세력이 약할 땐 평화의 종교로 위장하고 있다가 세력이 커지면 ‘지하드’를 개시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리에는 “알라를 위해서는 그 반대자를 반드시 죽여라. 포교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 라는 말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어찌 되었건 유럽 사회에서 그동안은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으나 이슬람이 확산된 이후에 수많은 국가들이 이것이 프랑스 정부의 똘레랑스(Tolerance)정책의 부산물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 허둥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들(이슬람종교)의 교리의 포학성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무조건적 관용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각 나라 국경선의 문턱이 갑자기 높아진 것이 그것이다. 갑자기 이민 정책을 재검토하는 어리석음보다 처음부터 어떤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맞게 서로가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지 늦장 대응의 후유증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큰 피해가 아닐 수 없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고 하던 우리 선조님들의 지혜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건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신앙인)도 각성해야 한다.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 아름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으나 결코 가볍게 사용해서도 안되는 말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그 단어의 뜻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다가는 이번처럼 무시무시한 참사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리 모두 자각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와 살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 법률을 준수하고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질서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장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에 무조건적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은 자기 자신에게나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보다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엄격하게 잣대를 두고 성경의 기준으로 자신을 맞추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좁은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똘레랑스(관용, Tolerance)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현대 교회의 병폐요 폐단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지적일까? 현대는 신학자는 많으나 알고 있는 만큼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은 너무 적다. 왜 다른 사람의 신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특히 이단 사역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잘못은 덮어두고 다른 이의 신앙생활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짐을 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 천국 가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 앞에 설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대 기독교가 점점 하향하는 추세라며 염려하는 목소리는 높은데 “회개”를 외치는 사람은 적다. 초대교회는 달랐다. 다른 사람을 질책하고 비판하기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진실되게 살아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믿는 사람이 날로 늘어갔다. 진실한 성도,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되어 결국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더 나아가 내가 개혁되어야 전 세계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사다난하였던 이 한 해도 얼마남지 않았다. 지금껏 내 자신의 죄악에 대해, 게으름에 대해 관용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내 삶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바늘 도둑 같은 작은 죄라도 회개하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 모진 십자가 형벌을 감내하셨음을 잊지 말자.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나 자신의 죄를 관용하는 자, 남의 죄에만 관심이 많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장 미워하셨음도 기억하자. 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을 자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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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2015-12-28 17:10
96.xxx.163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 했습니다.
그는 종교가 권력화 하여 지배의 수단으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피지배자인 노동자를 현혹시키는 마약으로 본 건 계급투쟁으로 극복하지 못할 수단이 없을 때, 나약하게 종교를 믿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삼음을 비판 했지 종교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몇 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로 나중에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마르크스도 그의 영향을 받았기에 개신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전해지지만 그는 그의 계급투쟁을 상대적인 가난,
비교된 가난으로 치부하였기에
그의 사생활은 부를 지향한 자기 모순적인 생활이 되었습니다.
제가 마르크스 얘기를 함은 그를 사상을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하면 마약처럼
신앙이 진리를 떠나서, 자기도취와 자기 의에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되어 방종에 빠지면 거짓을 일삼아 이런 분류의 사람들에게 예의나
예절, 도덕 윤리는 물론 인격파탄이 되어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릅니다.
멀리서 볼 것 없이 여기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종교가 권력 화된 시대는 종교가 착취의 수단이 되었고
늘 죄악 된 캄캄한 사회였고, 종교가 정치와 야합하면 신정정치가 되어
지배와 비지배자의 신분을 나누어 계급사회가 되어,
지배자는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로 피지배자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삼고, 더하여
신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자나 이런 자를 지도자로
옹호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악용하면 제정일치가 되어 아랍 여러 나라들이 이런 형태이고
더하여 극단주의자는 더 극단적 통치의 수단으로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니
평화가 있을 수 없고, 통치와 착취를 위한 수단의 종교는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이비, 이단의 수단이기도 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선교라는, 성전 건축이라는 구실 등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낮아진 직분이면서 높아진 계급의 상징이 되어
지배자의 위치에서 피지배자를 가르고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라는 종교의 종교인이 아니듯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인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그러움과 용서를 ‘관용’을 자기 욕심의 변명으로 삼은 지도자나
관용의 남용으로 죄까지 남용하는 교계와 교회의 사건은 오늘 어제 일이 아닙니다.
관용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면 교만입니다.
타인을 위한 관용이라도 절제되지 않은 관용은 죄를 기피하는 수단이 되어
죄에 대한 방관이 되어, 오만이 되어 죄 지은 자를 죄를 인간적인 관계로,
직분의 상하관계로 두둔하여 긍정의 착각을 갖게 하면
그 집단은 죄에 대하여 무디게 되어 신앙의 순결성을 잃어버림은 물론 자체적인 정화능력이
소멸됩니다.
별똥별님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면서
새로운 결단을 보는 듯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감싸주는 명분이 아니듯이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도로 분별된 사랑입니다.
추천합니다.
체르니
2016-01-04 11:16
220.xxx.174
안녕하세요.별사모님! 오랜만에 아멘넷에 들어와보니 역시 반가운 글이 보여서 남깁니다. 항상 일관되게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전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기자석
2016-01-04 09:30
24.xxx.182
아주 작은 죄라도 회개하자는 말씀....
네... 회개하겟습니다.
초생달
2016-01-02 19:39
218.xxx.203
별똥별님. 지상낙원 하와이 로부터 옮겼셨네요.
님께서 관촬하시는 사계절은 더욱 정서가 깊습니다.건강에지장은
없스신지요, 새해가밝아왔습니다.
이곳 서울의 기독교의 소식역시 걱정스러운점이많씀니다 마는
님께서 주님을향하신 뜨거운 믿음에 주님께서는 능히
굽어살펴주실것으로믿습니다.
새해에도 좋은 복음 많이 올려주셨으면합니다.
아멘넷 여러 어르시님과 이 종철 선생님에게 주님의 사랑이
덤뿍내려주시기를기원드립니다.
특히 이 종철 선생님에게는 많은 지도편달을 바라는바입니다.
누지문서
2015-12-30 10:44
173.xxx.79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 아름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으나 결코 가볍게 사용해서도 안되는 말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_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관용이란 겉모습을 가장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교회를 흔드는데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사회뿐 아니라 교회와 가정에 까지 침투한 똘레랑스의 양상과
폐해는 우리가 알고있는 이상으로 거셉니다.
별똥별님 , 한 해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하늘에서 주시는 지혜로 아멘넷에 좋은 글들을
계속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2015-12-29 14:30
175.xxx.115
구구절절히 옳은 말씀입니다!
또한 아주 중요한 지적이시구요.
근자에 나타났던 끔찍한 말세의 징조인 인간의 잔악무도한 모습을 근본 원인부터 파헤쳐 믿음을 가진 우리 기독교인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지를, 회개해야 할 명분까지 잘 지적해 주심에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네요. 여러가지 일로 바쁘셔서 참여치 못하시다가 이 해가 지나기 전에 좋은 말씀으로 마무리를 장식해 주셔서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한 사건을 보시며 믿음으로까지 다각도로 깊이 생각하시는 것을 보고 고개가 숙여지며 존경스럽네요! 새해에도 이와같이 좋은 말씀 종종 올려주세요.~^^
별님, 주 안에서 연말 연시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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