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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방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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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0-08-05

본문

요즘 교회와 교회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방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본다.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님들도 있고, 반대로 방언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방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은사주의', 심지어 '신비주의'로 몰아가며 방언은 초대 교회로서 중단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서로서로를 경계하며 손가락질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방언의 유익과 주의점" 에 대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같이 생각하며 나누어 보려고 한다.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과 혼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장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실제 성령님의 역사로 주께 올리는 영의 기도는 결코 무아지경이 되거나 정신을 잃거나 혼절한 상태에서 중얼거림이 아니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28절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했고,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혼 (이성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여러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그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全能)하나님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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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ble 
2010-08-29 19:38
 74.xxx.90
 최사모님
 사모님의 여기에 계심은 주님이 쓰심, 그 한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주님의쓰심을 그분의 뜻대로 이루는 과정엔 사모님의 위치를
 이용해 본질을 흐리게하는 시도들이 집요하게 계속될것입니다.
주님의쓰심은 그분의 길을가는 험한길임을 잘아십니다.
진실을 가려내는일은 그분이하시는 일이며 썩은살을 뼈에서
 도려내는 고통이 동반하기에 흔들림이 없는 담대함이 요구됩니다.

사모님의 여기에 계심은 주님이 인도하심, 그 한가지 이유때문입니다.
 
 별똥별 
예, Humble 님, 제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함께 기도로 동참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든든합니다!!!
 
숙이 
2010-08-28 20:26
 75.xxx.114
 귀한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감사. 고운님감사!!! 늘행복하소서.

anna 
2010-08-26 21:40
 210.xxx.38
 나에게 성령의 선물로 방언을 허락하셨다면 그 선물로 주신 방언을 통하여 나에게 요구하시는 그 무언가가 있을테고, 또 방언이라는 것을 받지 못했다면 그 나름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방언과 그외의 여러가지 은사들에 대해 자유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부족한 여종인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단순합니다.^^*
주님도 이런 제게 저에게 맞는 계획을 풀어주시겠지요? ^^*
언제나 사모님의 글로 인해 저의 지식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thomas 
별똥별님, 저는 아멘넷에서 배운 것이 참 많습니다. 아주 색다르고 "중독"的이기도 하지만...전 기독교 고전에 관심이 많아서, 오리겐 어거스틴 칼빈 에드워즈 등이 방언은 외국어라고 단정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당면한 사건이나 그간 주변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살피고, 특히 별똥별님 같은 분들의 글이나 이야기를 경청하여 나름대로 재정리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방언에 대한 입장입니다. 고전 14장에 나온 <예언>이 구체적으로 무얼 뜻하는지 좀 더 생각해 보려 하지만 <방언>하는 사람이 있고, 방언이 그 사람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는걸 인정하는 것은 저로서는 큰 변화입니다. 한편 그걸 더 큰 테두리 내에서(카리스마타) 소화시킬 기회가 주어진 점, 주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8/26 22:24
 72.xxx.53
 
 별똥별  감사해요, thomas님...^^
님의 고백은,
짧은 댓글 속에 모두 담아두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소식이네요.
이 감격의 순간을 제게 허락하신
주님의 섭리하심에 찬양을 드립니다!!!
이번에 남기신 thomas 님의 말씀은...
댓글로만 남기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제 가슴에 영원히 담아두겠습니다!!!!

모모 
2010-08-09 20:44
 173.xxx.193
 최사모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이곳에서 귀한 사역중이시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부군 목사님과 사역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늘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초생달 

2010-08-08 07:10
 222.xxx.171
 "수박 걷핧기" 하나님을섬기는자라면 손톱만큼의교양을가추어계실것입니다.
경솔한 자기의판단을 이 사랑방에펼쳐놓으시다니....
별똥별님 "방언"에과하여서 아-주오래전부터 초생달이알고싶었는 가장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흔히 교회에서혼자만이 입속으로기도를드리는성도를만났습니다  마는 이해를못한적이있섰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상세하신글 감사합니다, 주님과함께계시는 별똥별님의
 건강하시며행복하시기를빕니다.


비둘기 

2010-08-06 20:31
 66.xxx.122
  모든 총명함과 지혜로움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것을  아시며
 많은 은사를 받으셨음에도  겸손하신 별똥별 사모님,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하심으로 
성령의 뜻대로  나누어 주고 계심에
 은혜로운 글 또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성령이 가르키신
    성경 그대로

    날위해 목숨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있다가 그치고 사라지나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

    주님의 손안에
    나의 생명이 살고
    주님의 뜻안에
    나의 인생길이 있으니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을 바라는 마음

    받은 구원 감사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도록
    성령의 은사들을 내려주옵소서
                                    올려주시는 모든 글을 사랑하는 자가

지혜자 
2010-08-06 10:54
 58.xxx.66
 별똥별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성경적인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 바른 삶에서 우러나오는
 균형잡힌 글입니다. 사실 제가 바빠서 일일이 글을 읽지 못합니다.
댓글도 그렇고요. 정독은 아닐지라도 일견해볼 때 방언에 대해
 바르고도 깊이 있게 글을 쓰셨군요. 수고에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방언의 은사를 가장 먼저 받았었고, 그 뒤 한참 후에 여러가지 은사를
 받았습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주셨고
 강하지는 않지만 예언의 은사도 있습니다. 영분별 은사도 있고요.

저는 지금까지 은사를 남용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방언하는 줄을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 주변에.
가끔 예언을 하는데요,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합니다.
예를 들면 안수기도 중에 성령께서 강하게 알려주시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면 기도 끝나고나서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엄청 사모하고 있으시군요. 하나님께서 그 사모하는 마음을
 받으신답니다" 그렇게 예언해주면 상대는 감사하면서 눈물을 흘리지요.
저는 그 분이 하나님을 정말 많이 사모하는 줄 전혀 모르지만
 성령님은 다 아시지요.
제가 전도한 분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누워있었는데
 제가 기도해줄까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손을 얹고 기도하자마자 성령께서 감동을 강하게 주시더군요.
 '내가 그의 기도를 들었다'
그래서 그 분게 물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까?'
 '네' '하나님께서 선생님의 기도를 들으셨답니다'
저는 그 분이 예수님을 영접한지도 기도를 드렸는지도 몰랐습니다.

제 경우에 있어서는 위와 같이  예언을 가끔 하는 편입니다.
대부분 믿음이 연약하거나 어린 신자들에게 주로 안위를 주고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예언이 임하더군요.
입만 벌리면 예언을 쏟아내는 분들을 보면 저로서는 글쎄요? 입니다.

그리고 방언이나 예언을 깡그리 무시하면 그만큼 손해일 뿐입니다.
 별똥별  지혜자님의 지혜의 출처를 이제야 알았네요....^^
안수기도를 할 때 라고 하시면, 지혜자 님께서는 목사님이신가요?
저는 안수기도를 하지는 않구요, 개인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 드리는 때, 가끔씩, 아주 가끔씩, 그 사람의 형편이나 신앙상태를 가르쳐 주실 때가 있어요. 저는 그런 때를 가르켜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때라고 말합니다. 예언적 형태를 취하는 때가 많지만요, 예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 사도들이 성경말씀을 받듯,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니까, 어린 성도들이 혼란을 가져오구요, 또 이것을 틈타서, 신사도, 자칭 선지자, 자칭 예언자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유린하기 때문이지요. 신약시대의 예언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그 말씀으로 들려주시는 분별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8/6 15:40
 66.xxx.176
 
 별똥별 
결국, 박태선 씨과를 양산해 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 역시, 개인을 위해서 기도해 드릴 때, 주께서 말씀을 주시는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사명자일 경우는 말을 해 드리죠. 그러나, 죄에 대한 책망을 들었을 때는 입을 절대로 열지 않습니다, 그 영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 주라는 뜻으로 받고 매일 그를 위해 눈물로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주님께로부터 직접 듣기를 원하구요,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내주해 계시는 분이 성령,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거든요. 내가 다른 이보다 더 특별한 은사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그 순간부터 사단에게 노출 당하는 때인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지혜자 님은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분임을 알지만, 다른 독자님을 위해서^^ 8/6 15:53
 66.xxx.176
 
 김성훈  그런 건 "예언"이 아니라suggetions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때리지는'않으시는지'궁금합니다. 결국 뉴욕교계가 변승우씨系vs 反IHOP으로 나누어 지겠군요(이런 게'예언'입니다).모두들 30-50명정도의 tent-makers 교회가 대부분이게 될것입니다.한국으로의U-turn 도 많아 질거고...doulbe-dips과 deflation followed by superinflations가 있을 테고(이건 "에언"이 아니라 predictions입니다) 8/6 20:55
 69.xxx.27
 
 지혜자 
별똥별님 제가 왜 받은 은사에 대해 커밍아웃하는지 아세요?
나열한 은사 외도 다른 은사도 여럿 있습니다만 그 정도로 했구요.
은사를 말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하는 분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제가 자랑할 게 없어서 여러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겠습니까. 복음 자랑 주님 자랑 하기도 바븐 세상에.
제가 지난 날 받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예언에 대해 말을 하면
듣는 분들이 지나치게 생각을 할까봐서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리고 예언이란 현시대에 있어서 오남용되고 있기에
'예언'이란 용어를 쓰면 오히려 이상하게 취급을 받는 세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언의 형태도 다양하구요. 잘 사용하면 교회의 덕을 세우고 나아가 하나님의 일하심과 구원경륜을 이루심에 바르고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귀한  8/7 00:06
 58.xxx.66
 
 지혜자 
은사 입니다.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자신의 예언을 성경말씀으로 분별치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자의 예언남발은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은사에 대한 폭넒은 이해가 요구되는 시대이지만 그동안의 체험과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의 장'을 펴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요. 그냥 각자 받은 바 은혜대로 사십시오. 8/7 00:14
 58.xxx.66
 
 별똥별 
그(동안의 체험과 말씀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의 장'을 펴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요. ) -지혜자-
저는 지혜자님께서 좋은 가르침이 있으실 것이라 믿고 있어요. 우리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에라도 우선은 올려주시면요, 우리 독자님들께 유익하다는 느낌이 들게되면, 관리자님께서 지혜자님의 방도 따로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잖아요? 좋은 체험을 토대로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지요. 기대해 보겠습니다

누지문서 

2010-08-06 09:28
 71.xxx.71
 방언에 대하여 말씀의 근거에 서서
 실제적인 삶속에서의 구체적인 모습과
 개개인의 생각까지 어우르는 좋은 글입니다.

때아닌 신사도 열풍속에서
 별똥별님같은 올바른 사명자가 아멘넷에 있어
 선악간의 구별을 확실히 해주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올바르게 깨달아
 그 믿음 변치않고 천성에 이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체르니 

2010-08-06 02:42
 112.xxx.177
 먼저  holykang님께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키게 해서 죄송합니다.
음. 그리고 별사모님이 잘 구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예수님보다는 방언이나 은사에 미친듯이
 목을 매는지 모르겠어요."에 대한 의미는 "2. 가장 중요한 예수님보다는 방언이나 은사에 미친듯이 목을 매다는 group"의 부류와 비슷한데요.
성경의 본질을 외면한 채 그 외면적인 형식이나 체제, 정치세력화되는
 기존의 교회의 잘못된 한 단면의 양상처럼.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 성령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필요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들이 다양한데 유독 방언에 그리 관심을 가지을 가지는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끝으로 저역시 방언말하는 자로 목매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제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도 제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서,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배올 날이 하루 더 늦춰졌군요. 가족들을 생각하면 제가 이 세상에 더 오래 살아있어야 겠지만 제 개인적으론 더 빨리 예수님과 함께 같이 살고 싶답니다." 이게 현재의 아도나이 나의 주인되신 그분께 드리는 기도이며 이게 제 자랑입니다. 이만 물러갑니다.
 
 누지문서  예수님을 뵈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체르니님.
입으로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귀한 믿음입니다.
 
지나가는이 

2010-08-05 20:24
 99.xxx.42
 그리고 은사를 받으신 분들의 성숙함이 요구되는것 만큼 그것을 사모하는 분과 그리고 그것을 경계하는 모든분도 동일한 성숙도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신령한것"을 구하시는 분들의 마음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본인이 항상 경계해야할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왜" 구하는가 항상 질문해보셔야 할줄 믿습니다.  당연히 은사를 받으신분은 더욱 더 하구요.. 은사를 받으신 분들(전 모든 분들이 은사를 받으셨다고 믿는 사람이긴 하지만요)은 더욱 자신을 경계해서 주신 은사를 잘 사용하고 있는지,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하신 주님의 책망을 항상 경계하시면서 겸손하게 사역을 감당하셔야 할줄 믿습니다. 특별히 분별의 은사가 있으시거나 하니님의 지혜로 충만하신분들 (특별히 아멘넷에서 많이 활동하시는 훌륭하신 성도님들)은 언제나 "사랑과 섬김"으로서 공동체가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시고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등불 역할을 하셔야 하는 사명이 있으신줄로 믿습니다. 또한 은사의 유무(? 모두들 은사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서 이 표현은 조금 이상하네요)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으로 성장하는것이 저희 성도들이 바라야 하는 모습이며 서로가 사랑으로서 서로를 세우면서 함께 지어져 나가는것이 저희를 공동체로 부르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모두가 말하는입과 듣는귀 모두 필요하며 보는 눈과 행하는 손이 모두 필요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며 그 주님의 복음을 들고가 전해줄 발또한 필요합니다. 각각 다른 은사지만 어느하나도 따로 떨어져서 제대로 작동할수 없슴을 모두다 잘알고 있습니다. 하기에 저희는 각자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던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있어야합니다. 저희가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할것은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안에 있느냐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느 분의 은사나 행동 또는 인격등에 의해 상처가 생기거나 분열이 생긴다면 정말로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어떻게 행동을 하는것이 맞는일인가 생각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의 댓글들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상합니다. 어떻게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마지막때에 가서 누가 맞나 보자 라던가 아니면 내 생각이나 학문적 소양이 이런데 날 한번 설득해 봐라 식으로 토론이 진행되는지 정말로 가슴이 아픕니다. 어째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서로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릴까를 이야기 하는것보다 누가 누구편인지 가르는것에 더 열을 올리는 것일까요?

어느 분이 다른글의 댓글에 말씀하신것처럼 토론을 통해서 서로 배우고 더욱 서로를 잘 이해할수 있다는 긍정적인 부분들이 있다는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위 저희가 "정립된 신학"이라는것도 모두 이런과정과 이것보다 더 처절한 피흘림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는것도요. 본의 아니게 글을 쓰다가 보니 무슨 한풀이 식으로 호소하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그냥 요즘 댓글 전쟁을 보면서 과연 이래서 과거에 피흘림까지 있었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요. 별똥별님께 드리는 말이 아니라 그저 별똥별님의 글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아서 글을 시작했다가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혹시라도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 아멘넷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종들께 하나님의 지혜의 영이 더욱더 부어지기시기를, 그래서 점점더 어둡고 혼미해져 가는 시대에 작은 등불로서 사용되어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든 주님의 가족들을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지나가는이  에구구 써놓고 보니 이렇게 길어졌네요.. 쓸데 없는글로 도배해서 죄송합니다.. ㅠ,ㅠ 8/5 20:25
 99.xxx.42
 
 별똥별  쓸데없는 글로 도배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동감이 가는 좋은 의견을 남겨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또한 은사의 유무(? 모두들 은사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서 이 표현은 조금 이상하네요)를 떠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으로 성장하는것이 저희 성도들이 바라야 하는 모습이며 서로가 사랑으로서 서로를 세우면서 함께 지어져 나가는것이 저희를 공동체로 부르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이 부분은 더욱 아멘, 아멘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내려주시는 그 사랑이, 부족한 대로, 이 아멘넷에서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쓰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됨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더욱 좋은 말씀 많이 남겨주시고요 주님 안에서 좋은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8/5 20:38
 66.xxx.176
 
지나가는이 

2010-08-05 20:23
 99.xxx.42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좋은 글을 보고 감사의 마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여러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이 많은 이유중의 하나가 은사의 유무를 성숙도의 척량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서 오지않나도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은사 (방언, 찬양, 말씀, 목회 등등 넓은 의미에서의)가 있고 아무리 강력해보이거나 신령해 보이는 은사가 있다한덜 그것이 곧 신앙의 성숙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면 큰 오류에 빠지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도 얼마든지 약하고 쓰러지기 쉬운부분이 있는것 처럼 드러나는 은사의 유무를 떠나서 사람은 언제나 연약하고 하기에 그래서 주님께 의지하면서 나아갈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다른분들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제 자신을 보면 그렇다는 결론이 바로 나오는것을 고백합니다.

짧은 간증을 하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이나 그런 비밀스런 은사를 반대하던 입장이었지만 -- 당시 제 생각은 제 자신의 모든것, 의지와 지식 생각등의 모든것을 다 드리면서 주님께 아뢰고 기도하는게 하나님께서 훨씬더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본인도 모르는 랄랄라 거리는것은 필요도 없을뿐더러 사모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모하는 분들을 표적을 구하며 진정으로 주님을 바라지 않는 무리라고 정죄하는 교만함도 있었구요 --
아이러니 하게도 어느날 찬양을 들으며 장거리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방언이 터져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이게 무슨일이지 그당시엔 전혀 이해할수 없었는데 그 다음날 갑자기 집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가족중에 한명을 하나님께서 불러가셨다는.. 사랑하는 제 가족을 주님품으로 돌려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평안을 주시는것은 바로 절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일에대한 중보를 시키셨다는 확신을 주셨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믿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나누고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우리를 얼마큼 사랑하시는지를 나누게 되었고 그래서 그 가족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그걸 계기로 마음을 열으셨고 다른 가족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방언등 저희가 이해하기 어려운 초 자연적인 은사를 다 사단의 일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저는 제 간증을 드리면서 이 질문을 드립니다. 만일 이것들이 다 사단의 장난이라면 어째서 사단의 장난에 놀아나는 무리들은 더 열심으로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느냐고 여쭤봅니다. 물론  감각주의나 교만에 빠져서 중심을 잃어가시는 분들도 많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논란이 발생하는것을 잘 알고있지만 본질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좀더 "느끼고"싶어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분들을 주님께서 한쪽이 치우쳤다는 이유만으로 내치실까요? 그리고 그런분들을 사단에 놀아나는 무리라고 정죄하는 모습은 제가 보기에 치유사역을 하시는 예수님을 귀신의 힘으로 치유한다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질문을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눅 11:17-20)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로 사단이 사용한자들은 누구인가요? 제 생각엔 이런 논란들이 영을 분별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에는 맞을지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그 뜻을 위해서 행하실 방법은 아닐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랑 조금 벗어날려고 하네요 죄송합니다. 요즘 워낙에 서로 자신의 의를 주장하시는 분들의 댓글 논쟁을 보면서 속상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리고 이글이 제 의를 주장하는 또다른 교만한 글이 된다면 용서를 빕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한적도 없고 수십년동안 교회에서 섬기던 사람도 아닌 그저 예수님 만나서 죄인됨을 고백한지 5년정도 밖에 안된 어찌보면 이런곳에서 논쟁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말을 조리있게 잘 쓰는것도 아니구요. 그저 제 글이 주제가 넘는 부분이 있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말은 저는 은사를 하나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도가 그 은사를 하나님의 뜻하신대로 사용할수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구요. 제가 생각하는 은사에 대한 관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고 그 선물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목적을 잃는 순간 그 은사는 잘못 사용되어지기 시작되는것이구요. 방언의 경우에 기도를 하지 않는 분께 만약에 그 은사가 주어졌다 (그럴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다고 치면).. 그렇다면 당연한 성숙된 반응은 하나님께 더 기도를 해야겠다이어야지 난 하나님께서 부르신 특별한 사람인가보다가 아닌게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언변이 유창하신 은사가 있으신분이 성숙하지 못하면 그분은 사기꾼내지는 교주가 될 기질이 다분한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은사에 성숙한 신앙이 없으면 의미가 바랜다는 당연하고도 당연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구요.
 
 holykang  좋은 글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함니다
 
돕는은혜 

2010-08-05 18:12
 74.xxx.67
 여러 졸글에 반응해 주신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 글들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모습이 무척 감동입니다.

방언에 대해 성경적인 의미를 되짚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했고,"(본문에서)

방언은 하나님의 일, 즉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방언을 오용하는 일이 많은 점이 안타깝습니다.

울랄라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고 할렐루를 반복해서 인위적으로 혀를 돌리게 하는 모습이 마치 방언이 테크닉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런 단순 테크닉화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는 일이 계속되는 한 이것은 신성모독을 가속시키며 사탄이 원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thomas 
 지나가는님이 놓으신 진솔한 글을 감사의 마음으로 감동하며 받았습니다.
"좀더 "신령한것"을 구하시는 분들의 마음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본인이 항상 경계해야할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왜" 구하는가 항상 질문해보셔야 할줄 믿습니다."
꼭 은사를 갈구하는 분만 아니라, 우리가 왜 교회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가? 하면서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할 기도제목입니다.
"댓글 전쟁"은 우리가 처한 때와 장소가 그러한 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 교회에 인터콥 IHOP등 신사도운동의 영향이 만연하여 유스그룹 아이들에게 까지 이들의 마수가 뻗치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8/5 23:15
 72.xxx.53
 
 김성훈  이수일 박사님칼럼에 옮겨 놓겠습니다. 8/5 23:26
 69.xxx.27
 
 thomas  저는 뉴저지 중부에 살고 있는데, 가까운 곳의 교인이 많아지는 교회도, 뉴장처럼 목사가 커밍아웃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 예배의 형태를 보거나(빈야드에 깊이 영향 받은 찬양예배),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내심으로 추구하는 신비주의적인 신앙 양태를 보면, 신사도의 영향이 이미 도처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변승우 벤자민 오 같은 자가 지척에 세력을 확장하고 이젠 대낮에 신도들을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쟁"을 치룰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멘넷에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모두 크리스챤이고 주안에서 형제와 자매인가? 이건 큰 의문이지만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니겠지요? 특히 목사님들이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최소한의 제역할(건전한 신학)만 해주어도 이곳 댓글이 확 줄텐데  8/5 23:31
 72.xxx.53
 
 thomas  그리고 이건 사족인데,
'은사'와 '달란트'는 서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글을 잘 쓰는 재주가 있고 나는 수학적인 재능이 있다"고 할 때, "글"과 "수학"은 서로 다른 "은사"에 해당합니다. 한데 "너는 "글"을 별**님만큼 잘 쓰는데 나는 김**님 만큼도 못하다"라고 할 때는 같은 것 내에서 달란트 크기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은사"라는 것이 때(중단-계속)와 장소(진짜-짝퉁)에 따른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은사라는 독특한 성질 때문입니다.
다들 그러는건 아니지만 제가 아는 교우들, 특히 이민교회에서 새신자가 되신 분들 중에는 달란트와 은사를 구별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은사란 말이 신약성서에 두가지가 있는데 주말에 정리하여 올려보겠습니다.
 
여야 
2010-08-10 11:06
 71.xxx.140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 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 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이름아이콘 여야 

2010-08-10 11:04
 71.xxx.140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고전14:2,4) 회중 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4. 만일 증거 혹은 은사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왜 교회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는가?
어떤 성경적인 교리가 태만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사실 위대한 영적 개혁은 자주 교리의 부흥이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마틴 루터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강조할 때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었다. 성화의 교리는 다시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는 웨슬리 부흥운동 때까지 무시를 당해왔다.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진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20번 이상의 부흥기에 나타났었으나, 최근의 부흥운동 안에서처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의 부흥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리를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초기 사역시의 그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모든 신자들을 위한 지침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살전5:21) 시험의 근거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행17:11)

 5.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교리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성령세례를 추구하기보다 방언을 추구할 위험성이 있는가?
불행히도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리의 남용이 교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남용과 가짜는 교리를 논박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순수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방언이 성령세례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함 받기를 힘쓰는 것이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 방언은 자연스럽게 이 경험에 수반된다.

6. 만일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면 영적 교만의 유혹은 없겠는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 대신에 겸손을 낳게 할 것이다. 신자들은 인격적 고귀함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봉사와 보다 의미 있는 사람을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자신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얻거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7. 방언으로 말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은 어떤가?

방언을 못하는 헌신된 신자들 안에 성령이 거하시며, 이런 신자들 중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가장 헌신된 신자의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회중 안에 있는 경우가 아니면, 개인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각각 다른 성질의 재능과 다양한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무엇을 완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공급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더 많이 성취했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성경은 신자들이 인간 비교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경험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여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하고 기록하였다. 교리는 항상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결론
 요약하면 성경의 기록은 성령세례에 관하여 상세히 다룰 때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유일한 현상임을 말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수반되는 경험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사도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개인지도와 예배에 있어서 신자를 위한 특권이며 신자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회중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성경적인 제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일이 적당히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또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 39-40)고 말씀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신자를 위한 특권이다. 바울이 “나는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 (고전14:5)고 기록했을 때 그는 비성경적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야 

2010-08-10 11:10
 71.xxx.140
 최근에 한국총회 웹싸이트에 올라온 eBOOK-S-16-InitialEvidence의 번역본 입니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 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 (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
 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 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 (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적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여야  개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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