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논증-규모와 현상의 논거에 설득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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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2-04-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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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중국 전한(前漢)의 제9대 황제인 선제(宣帝:BC 74~BC 49) 때 서북 변방에 사는 티베트 계통의 강족(羌族)이 자주 쳐들어와 백성을 괴롭히고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선제는 토벌군을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토벌군 지휘관으로 누구를 임명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어사대부(御史大夫) 병길(丙吉)에게 토벌군의 사령관을 누구로 하였으면 좋을지 조충국(趙充國)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조충국은 젊어서부터 여러 차례 흉노(匈奴)와의 싸움에 출전해 많은 공을 세운 명장이었지만, 지금은 현직에서 떠난 76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어사대부가 조충국(趙充國)에게 황제의 뜻을 전하자 조충국(趙充國)은 자신이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나가 싸우겠다며 황제를 알현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어사대부가 조충국을 황제에게 데려갔고 조충국은 황제에게 자신이 토벌군을 이끌고 나가 싸우겠다며 보내달라고 간청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를 아는 선제(宣帝)는 “그대의 충성(忠成)과 실력(實力)은 능히 알고 있지만, 지금 그대의 나이가 76세나 되지 않았는가?”이에 조충국은 비록 몸은 늙었지만 오랑캐를 물리치는 방법을 자기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제는 그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토벌군은 몇 명이나 주면 되겠소? 또 어떤 전략을 세울 작정이요?"라고 묻자, 조충국은 "지금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직접 제가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강족(羌族)이 사는 금성군(金城郡)으로 숨어들어가 지형과 정세를 살펴 자신이 파악한 형세와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세워, 정면충돌은 피하고 화친을 맺어 적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한 뒤 내분을 일으키는 전략으로 강족(羌族)을 쉽게 정복하였습니다. 이에서 유래된 말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인데, 이는 탁상공론(卓上空論)보다 실전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낼 때, 또는 이론보다 실제가 중요함을 강조할 때 쓰이는 고사성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백문불여일견,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할까요? 인간사 많은 부분에서 백문불여일견은 유용하게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보는 것은 직접 경험이고 듣는 것은 간접경험이기 때문에 법적 증인의 경우 사건에 대하여 백 번 들은 사람보다 한 번 목격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객관적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흔히 듣는 것은 보는 것에 비해 객관적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서울 가 본 사람과 못 가 본 사람이 싸우면 못 가 본 사람이 이긴다.’고 하여 듣는 것의 신뢰성을 폄하합니다.
그런데 보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이고, 또한 본 사람이 본 것을 이야기 할 때 불가피하게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증인이 증언을 할 때 객관적 사실만 말하고 주관적인 해석이 첨가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나 이론이나 이념이나 사상 등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누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관적인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관점이라고 하거나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기의 관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새의 울음소리를 즐거운 소리로 듣거나 슬픈 소리로 듣는 것은 옳다 혹은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보수적인 사상을 좋아하건 진보적인 사상을 선호하건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며 권리입니다. 이 세상의 상대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와 취향과 관점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개인의 권리와 취향과 관점이 진리나 보편 가치를 해친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인간 사회는 진리나 보편 가치의 토대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모두에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 눈으로 보게도 하시고 듣게도 하셨지만 보는 것의 위험을 경계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의 모든 계시를 말씀으로 들려주셨고 형상으로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에 관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약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보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본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본 것을 누군가 설명한다고 해도 그 설명이 주관적 견해가 될 위험이 있고, 나아가서는 그 설명을 듣는 이들이 가감하여 들을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이 심오한 영적 체험을 이야기 하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을 따른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방법이고 성경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신학은 아무리 주의하고 조심해도 인간의 견해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전통적인 교리와 신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인간적인 것이 첨가되지 않도록 노력하여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와 신학은 성경과 같이 완전하지는 않아도 그 완전한 성경을 바르게 알고자 하는 최선의 방법인 셈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배움에 있어서 교리와 신학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성령께서 교회에게 그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을 배우고 깨닫는데 있어서 교리와 신학을 사용하게 하셨다고 나는 믿습니다. 이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완전한 인간의 뜻이 첨가되는 것을 막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한 주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한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처를 보여주시며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듣고 믿는 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진리는 듣는 것이 최선입니다. 본다는 것은 개인이 직접 확인한다는 의미라면, 듣는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이라는 뜻입니다. 자유주의도 결국에는 보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고,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나온 실존주의도 결국은 보는 것에 의존한 것이며,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정통주의도 보는 것, 즉 주관적 이해에 의존하는 것이고, 신비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감각적이고 주관적이고 세속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와 신비주의가 결국에는 같은 실증과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길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규모에 압도되고 현상에 설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적 규모나, 메가 프로젝트, 천문학적 재원은 대중이건 학자건 성직자건 구별 없이 압도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WCC 규모에 압도되고 그 현상에 설득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목사들이 WCC 와 세계 교회에게 드리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WCC를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설된 WCC는 110개국, 349개 교단, 5억6천만의 신자들로 구성된 세계기독교의 대표적 연합체로서 교회의 일치와 교제, 공동선교와 봉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복음을 증거해 왔습니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가 세계기독교사적 의미를 지닌 WCC총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 앞에 책임 있는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WCC의 정체성에 대해, 그 단체가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논의를 그 단체의 세계적 규모와 참여자들의 성격과 수를 논거로 제시하면서 내심 그 규모에 크게 고무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판이란 명분이고 실제로는 감동하고 환영하고 장려하고 있음을 그들의 행보와 글의 행간에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百聞不如一見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경 말씀보다 더욱 실제적 설득력으로 작용합니다. 진리 논쟁에서 규모에 압도되고 현상에 설득되는 것은 성경과 전통 교리와 신학의 취약성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목사가 WCC에 참여하는 변으로 “우리는 누구나 죽을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며 “WCC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했는데, 그런 논리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방종교 모임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참여하고, 이단성이 있는 단체도 너그럽게 포용하며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편협한 기독교인으로 취급받게 합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세상의 어떤 이방 종교나 이단이나 심지어 범죄 집단에게서도 우리는 배울 것이 많고, 때문에 그들과 연합해야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진리를 세우고 증거하는 일에서 규모나 현상을 논거로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신 4:15절
그러나 그의 나이를 아는 선제(宣帝)는 “그대의 충성(忠成)과 실력(實力)은 능히 알고 있지만, 지금 그대의 나이가 76세나 되지 않았는가?”이에 조충국은 비록 몸은 늙었지만 오랑캐를 물리치는 방법을 자기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제는 그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토벌군은 몇 명이나 주면 되겠소? 또 어떤 전략을 세울 작정이요?"라고 묻자, 조충국은 "지금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직접 제가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강족(羌族)이 사는 금성군(金城郡)으로 숨어들어가 지형과 정세를 살펴 자신이 파악한 형세와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세워, 정면충돌은 피하고 화친을 맺어 적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한 뒤 내분을 일으키는 전략으로 강족(羌族)을 쉽게 정복하였습니다. 이에서 유래된 말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인데, 이는 탁상공론(卓上空論)보다 실전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낼 때, 또는 이론보다 실제가 중요함을 강조할 때 쓰이는 고사성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백문불여일견,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할까요? 인간사 많은 부분에서 백문불여일견은 유용하게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보는 것은 직접 경험이고 듣는 것은 간접경험이기 때문에 법적 증인의 경우 사건에 대하여 백 번 들은 사람보다 한 번 목격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객관적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흔히 듣는 것은 보는 것에 비해 객관적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서울 가 본 사람과 못 가 본 사람이 싸우면 못 가 본 사람이 이긴다.’고 하여 듣는 것의 신뢰성을 폄하합니다.
그런데 보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이고, 또한 본 사람이 본 것을 이야기 할 때 불가피하게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증인이 증언을 할 때 객관적 사실만 말하고 주관적인 해석이 첨가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나 이론이나 이념이나 사상 등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누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관적인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관점이라고 하거나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기의 관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새의 울음소리를 즐거운 소리로 듣거나 슬픈 소리로 듣는 것은 옳다 혹은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보수적인 사상을 좋아하건 진보적인 사상을 선호하건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며 권리입니다. 이 세상의 상대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와 취향과 관점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개인의 권리와 취향과 관점이 진리나 보편 가치를 해친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인간 사회는 진리나 보편 가치의 토대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모두에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 눈으로 보게도 하시고 듣게도 하셨지만 보는 것의 위험을 경계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의 모든 계시를 말씀으로 들려주셨고 형상으로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에 관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약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보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본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본 것을 누군가 설명한다고 해도 그 설명이 주관적 견해가 될 위험이 있고, 나아가서는 그 설명을 듣는 이들이 가감하여 들을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이 심오한 영적 체험을 이야기 하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을 따른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방법이고 성경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신학은 아무리 주의하고 조심해도 인간의 견해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전통적인 교리와 신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인간적인 것이 첨가되지 않도록 노력하여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와 신학은 성경과 같이 완전하지는 않아도 그 완전한 성경을 바르게 알고자 하는 최선의 방법인 셈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배움에 있어서 교리와 신학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성령께서 교회에게 그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을 배우고 깨닫는데 있어서 교리와 신학을 사용하게 하셨다고 나는 믿습니다. 이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완전한 인간의 뜻이 첨가되는 것을 막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한 주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한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처를 보여주시며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듣고 믿는 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진리는 듣는 것이 최선입니다. 본다는 것은 개인이 직접 확인한다는 의미라면, 듣는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이라는 뜻입니다. 자유주의도 결국에는 보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고,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나온 실존주의도 결국은 보는 것에 의존한 것이며,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정통주의도 보는 것, 즉 주관적 이해에 의존하는 것이고, 신비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감각적이고 주관적이고 세속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와 신비주의가 결국에는 같은 실증과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길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규모에 압도되고 현상에 설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적 규모나, 메가 프로젝트, 천문학적 재원은 대중이건 학자건 성직자건 구별 없이 압도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WCC 규모에 압도되고 그 현상에 설득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목사들이 WCC 와 세계 교회에게 드리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WCC를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설된 WCC는 110개국, 349개 교단, 5억6천만의 신자들로 구성된 세계기독교의 대표적 연합체로서 교회의 일치와 교제, 공동선교와 봉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복음을 증거해 왔습니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가 세계기독교사적 의미를 지닌 WCC총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 앞에 책임 있는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WCC의 정체성에 대해, 그 단체가 성경적이냐 아니냐의 논의를 그 단체의 세계적 규모와 참여자들의 성격과 수를 논거로 제시하면서 내심 그 규모에 크게 고무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판이란 명분이고 실제로는 감동하고 환영하고 장려하고 있음을 그들의 행보와 글의 행간에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百聞不如一見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경 말씀보다 더욱 실제적 설득력으로 작용합니다. 진리 논쟁에서 규모에 압도되고 현상에 설득되는 것은 성경과 전통 교리와 신학의 취약성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목사가 WCC에 참여하는 변으로 “우리는 누구나 죽을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며 “WCC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했는데, 그런 논리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방종교 모임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참여하고, 이단성이 있는 단체도 너그럽게 포용하며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편협한 기독교인으로 취급받게 합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세상의 어떤 이방 종교나 이단이나 심지어 범죄 집단에게서도 우리는 배울 것이 많고, 때문에 그들과 연합해야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진리를 세우고 증거하는 일에서 규모나 현상을 논거로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신 4: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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