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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모든 가치의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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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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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교 선생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거칠게 하고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 3:2)고 하여 “삼가라”는 표현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유대교 선생들의 위험이 긴급하고 실제적이었던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개들은 이방인을, 행악자는 자신을 추구하는 기독교 교사들을, 몸을 상해하는 것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거짓 선생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각도에서 묘사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는 것은, 의미는 사라지고 순전히 형식만 남아 있는 할례를 경계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교 교사들을 “개들”이라고 지칭하여 치욕과 경멸의 표현으로서, 그들의 불결함과 파렴치함과 성가심을 노골적으로 질타하며 경고하였습니다. 당시 도시에는 주인도 집도 없는 개떼들이 길거리의 쓰레기와 오물로 배를 채우며, 서로 으르렁대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격하였는데, 유대교 교사들이 바로 그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행악하는 자들”이란 복음을 왜곡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전성을 거부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할례란 마음의 부정과 무감각을 잘라버리는 것인데, 그들에게 할례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육체를 절단하고 그것을 자랑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무가치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충분성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유대교 교사들을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라고 하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사람들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육체”란 할례를 행하는 몸을 가리키지만 보다 넓은 뜻으로 육에 속한 사람, 옛 성품, 자아를 가리킵니다.

유대교 교사들 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육체적, 지적, 정신적, 의식적 노력과 특권을 자랑하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그런 것이 자랑거리요 신뢰할만한 것이라면 바울은 누구 못지않게 육체를 신뢰할만하다고 부득불 내키지 않는 자랑거리를 열거하여“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구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다”고 하였는데, 여기 “그러나”란 모든 가치를 재평가 하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유익했던 것들, 그가 신뢰할 수 있었던 육신적 장점과 특권, 혈통, 엄격한 율법 준수, 열심 등을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전의 그에게 plus였던 것이 이제는 zero가 된 것이 아니라, plus가 minus로 바뀐 것입니다. 그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의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빛 안에서 바리새적 의의 ‘무흠한 생활’이 얼마나 죄스러우며, 그릇되며, 영혼의 구원을 위험하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이것은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세와 생활방식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가치가 모든 다른 것보다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모든 가치의 재평가는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어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고 입증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 세상에서 인정받고 칭찬 받고 높임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학자로 인정받는 것과 열심 있는 유대교 신자로 인정받는 것도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율법에 탁월한 학자로서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좋은 조건을 포기하였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박사님”,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면 기분이 좋았지만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인정받고 평가 받고 싶을 뿐입니다. 출신학교가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가문이 좋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박사 학위를 몇 개를 가졌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때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지나가는 말로 자기를 부를 때 ‘교수’보다 ‘목사’라고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목사로 불러지는 것이 가장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교수에게 학위가 없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잘 알지만 그런 것의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철저히 재평가하시는 분이셨기에 ‘목사’로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하고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절실하게 소원하지를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 얻었다는 확신이 있고, 장차 들어갈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생략 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확정된 것이지만 또한 이루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성화의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 과정의 끝에 부활이 있습니다. 여기에 확정된 인생의 목표가 있고, 방황이 끝나고 지름길 인생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제 누가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목표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지엽적인 문제로 갈등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비난해도 괘념치 않고, 공격해도 대항하지 않고,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있어도 용서해야 합니다.

싸우려 드는 사람이 있으면 피하고, 참을 수 없는 일도 참아야 합니다. 좀 더 너그러워 지려고 노력하고, 겸손하게 처신 하고, 온유하게 말하고, 덕이 되지 않는 말이나 일은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도 조심하고, 아무데나 가지 않고, 사랑하고 은혜를 나누고 가능하면 말을 덜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유익되고 덕이 되는 말만 하려고 노력하되 경직되고 딱딱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언제나 웃으며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즉흥적이고 감정만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경건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빌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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