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외로움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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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2-04-0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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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때였습니다. 그 날 모든 부모님들이 자기 아들딸들의 도시락을 준비하여 운동회에 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모두 부모님을 찾아 만나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나의 부모님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나의 도시락을 친척 아주머니께 보내고 운동회에 못 오셨습니다. 친척 아주머니는 함께 먹자고 했지만 나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혼자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 서럽고 슬펐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고 집으로 가기가 싫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생에게도 곁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은 슬픔이고 절망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 되었을 때였습니다. 평소에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11), 이들은 바울을 따르다가 바울을 버리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사역 때문에 불가피하게 바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 나를 버렸으나”라고 한 것을 보아 바울은 어려움과 외로움을 겪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때 바울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는 것은 그가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주신 것을 구약의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구해주신 사건처럼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디모데는 아마도 스승인 바울을 따르던 이들이 스승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그를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비록 그들이 나를 버렸지만 너는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버린 이들을 용서하는 것을 스데반에게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바울은 그 일에 상당한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당시에는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아마도 돌이킨 후에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회상하였을 것이고, 그가 죽으면서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생각하며 그도 자기를 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본을 따라 자기를 버린 이들을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이 가장 처량하고 비참할 때는 믿고 따르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가 그를 팔았고, 다른 제자들도 화가 자기들에게 미칠까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을 때가 인간적으로 아마도 가장 슬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에 대해 말씀하시자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디모데는 신실한 바울의 제자였고 무엇보다 주님의 충성스러운 일군이었기에 그럴 리는 없지만, 옛날에는 제자가 스승의 원수를 갚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제자가 스승의 원수를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김형욱씨가 박대통령에게 항명을 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뒤 늦게 밝혀졌는데, 박대통령이 직접 김형욱씨를 죽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대통령이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을 눈치 챈 과잉 충성하는 이들이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권력을 의지하는 세상에는 이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디모데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말라고 당부한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은 누구나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디모데를 비롯하여 후대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그렇게 될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림받거나, 애매히 고난당하거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을 단순한 인간사로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지라도 신자에게 그런 것들은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가 됩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갈 때 바울처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나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주님만 붙잡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의 도움은 종종 나를 더 곤란하게 하고 위험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움은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울을 버렸을 때도 주님은 바울 곁에 계셨고 모든 위험과 악으로부터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체험이 많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4)
고난과 두려움과 배신과 아픔과 외로움과 슬픔은 나로 하나님만 붙들게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그래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인생은 지금 세상을 떠나도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이 놀라운 체험과 감사를 인하여 바울은 그의 말씀을 언제나 후렴처럼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맺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 되었을 때였습니다. 평소에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11), 이들은 바울을 따르다가 바울을 버리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사역 때문에 불가피하게 바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 나를 버렸으나”라고 한 것을 보아 바울은 어려움과 외로움을 겪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때 바울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는 것은 그가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때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주신 것을 구약의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구해주신 사건처럼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디모데는 아마도 스승인 바울을 따르던 이들이 스승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그를 따르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비록 그들이 나를 버렸지만 너는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버린 이들을 용서하는 것을 스데반에게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바울은 그 일에 상당한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당시에는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아마도 돌이킨 후에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회상하였을 것이고, 그가 죽으면서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생각하며 그도 자기를 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본을 따라 자기를 버린 이들을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이 가장 처량하고 비참할 때는 믿고 따르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가 그를 팔았고, 다른 제자들도 화가 자기들에게 미칠까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을 때가 인간적으로 아마도 가장 슬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에 대해 말씀하시자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디모데는 신실한 바울의 제자였고 무엇보다 주님의 충성스러운 일군이었기에 그럴 리는 없지만, 옛날에는 제자가 스승의 원수를 갚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제자가 스승의 원수를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김형욱씨가 박대통령에게 항명을 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뒤 늦게 밝혀졌는데, 박대통령이 직접 김형욱씨를 죽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대통령이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을 눈치 챈 과잉 충성하는 이들이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권력을 의지하는 세상에는 이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디모데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말라고 당부한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은 누구나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디모데를 비롯하여 후대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그렇게 될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림받거나, 애매히 고난당하거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것을 단순한 인간사로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지라도 신자에게 그런 것들은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가 됩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나갈 때 바울처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나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주님만 붙잡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의 도움은 종종 나를 더 곤란하게 하고 위험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움은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울을 버렸을 때도 주님은 바울 곁에 계셨고 모든 위험과 악으로부터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체험이 많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4)
고난과 두려움과 배신과 아픔과 외로움과 슬픔은 나로 하나님만 붙들게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그래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인생은 지금 세상을 떠나도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이 놀라운 체험과 감사를 인하여 바울은 그의 말씀을 언제나 후렴처럼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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