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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하나님께 역심을 품는 반역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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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03-11

본문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세계에서나 왕정 체제 아래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반역죄입니다. 반역죄는 역심을 품은 당사자는 물론 삼족을 멸하여 반역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다스려졌습니다. 역심을 품은 반역자가 부모형제나 심지어 아내나 남편이라 하여도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군대에서나 공화정이나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항명(抗命)은 무거운 죄로 다스립니다. 인간 사회에는 다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질서가 필요하고 그 질서가 자발적으로 지켜지지 못하기 때문에 통치가 필요하며 통치에 거역하는 행위를 반역 또는 항명이라 하여 엄히 다스리는 것입니다. 반역이나 항명을 엄히 다스리는 것은 그것이 곧 모두의 안전을 위협하는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반역과 항명에 해당되는 죄를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교만에 대한 처벌로 인간 왕정 체제 아래서처럼 삼족을 멸한다는 말은 없지만 그 벌이 마귀를 정죄하는 벌에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3:6). 비록 이방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지나친 교만은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왕을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고 부르며 그가 몰락한 것은 교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왕이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항명하거나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방 신화에 등장하는 하늘 신들의 상좌에 오르려 한 것을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고 한 교만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열국과 그 왕들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제국의 왕들은 언제나 하나님처럼 열국을 그 발아래 두려하는 교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몰락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제국의 왕이 급락하는 것을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것과 거대한 나무가 찍혀 쓰러지는 광경을 연상하도록 묘사하였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아침의 아들 계명성”을 초대 교부 터툴리안과 그레고리 대제는 누가복음 10장 18절을 근거로 하여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오늘날까지 “루시퍼”가 마귀의 왕을 가리킨다는 대중적 오해가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바벨론 왕의 지나친 교만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역심을 품고 반역하는 일은 하나님의 천사나 하나님의 사역자나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삼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지셨습니다(벧후 2:4). 천사가 지은 죄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것(유 1:6)이라고 하였는데, 그러한 행위는 틀림없이 하나님께 역심을 품은 반역 행위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비롯하여 악한 왕들의 죄는 모두가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직접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한 마음이나 말이나 행위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직접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교만합니다.

하지만 직접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하든 사람에게 대하여 교만하든 교만은 결국 하나님께 역심을 품는 반역행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나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를 따로 나누어 평가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형제에게 교만한 것이 곧 하나님께 교만한 것이고 어린아이나 힘없고 약한 자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나 약한 자 모두를 들어 사용하시고 천한 자나 높은 자도 사용하시기에 그 누구에 대해서도 교만한 것은 곧 하나님께 교만한 것입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곧 그를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만의 죄에 대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강조하였습니다. 내가 몇 년 전 노회장이 되었을 때 나는 엉뚱하게도 노회장 된 기념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기로 작정하고 일 년 동안 줄을 그어가며 숙독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지만 새로운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고 정직했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전의식이 깨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곧 경건으로 나타나는데,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흔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성경보다 자기를 기억하거나 기념하게 될까봐 걱정하였습니다. 성령께서 특별히 그에게 그와 같은 은혜를 주셨지만 그는 그의 많은 배움과 깨우침을 어거스틴으로부터 받았을 것입니다.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직접 어거스틴을 인용한 내용이 많을 뿐 아니라 특히 교만을 경계하고 인간은 겸손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도 어거스틴으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시대 이후에 가장 탁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도 탁월하지만 어거스틴은 그 누구보다도 신학과 경건과 학문에 있어서 창조적(?)입니다. 한 때 탕자처럼 방황하기도 했지만 그의 천재성과 학문과 신학과 경건에 있어서의 창조적 업적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 시대에 있어서 교만해 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가장 심각한 죄는 첫째도 교만이고 둘째도 교만이고 셋째도 교만이라고 하였으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덕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은 하나님께서 교만을 얼마나 싫어하시고 겸손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지식으로만 안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는 시편 8편 2절은 칼빈이 즐겨 묵상하고 인용한 말씀인데 성산 장기려 박사도 이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다고 하니 이들은 교만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경계하며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말로서가 아니라 거짓 없는 마음과 태도와 행동으로서 진정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할 텐데 나는 언제나 그 일에 자신이 없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자꾸만 교만하게 되려하기에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 욥 2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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