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크지만 가장 작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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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2-03-0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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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평가는 마치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천국에서 가장 작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활동을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그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하고 풍부했습니다. 인식 뿐 아니라 그는 자기 입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증거를 듣기도 하였고 성령께서 증거 하시는 것도 목격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거기 성 삼위가 임재하심을 보았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라는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세례를 받으시는 성자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재하심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에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으시려 하시느냐고 하면서 세례 베풀기를 사양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로 쏠리는 것에 대해 자기의 제자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구약 계시가 지향하는 화살표의 끝이 예수님께 닿도록 하는 일에 혼신(渾身)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고 물었습니다.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처럼 세례 요한에게 의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런 질문을 그들의 입에 넣어 주어 예수님께 보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그렇게만 보는 것도 무리입니다. 그 질문에는 어떤 차원에서건 세례 요한의 의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메시야인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메시야로서의 결정적 증거가 될 만한 어떤 것이 왜 없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메시야로서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 하시고 계시는 일이 다른 것이어서가 아니라 메시야 사역과 계시의 성격상 예수님께서는 우선하실 일을 하시고 계셨고 세례요한은 조금은 성급하게 심판의 메시야로서 결정적 역할을 기대하였기에 그런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친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증거 한 것을 보아 당시 유대인들처럼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메시야는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메시야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이 기대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악인에 대한 결정적이고 강력한 심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심판이 임박하였다고 증거 하였는데 자신이 부당하게 옥에 갇혔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보고를 제자들을 통해서 감옥에서 들었지만 악인에 대한 결정적 심판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왜 악인에 대한 심판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 일을 할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태도는 그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메시야를 오해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질문은 그의 메시야 이해의 한계를 보여준 것뿐입니다. 메시야는 심판자이심이 맞습니다. 그 메시야는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어 던지실 분입니다. 도끼로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찍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증거는 메시야 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장차 임할 심판이지만 임박하다고 한 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하는 것은 종말론적 긴장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그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사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만약에 회개가 없을 경우에는 심판은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악한 헤롯을 책망한 것 때문에 옥에 갇혔고 아무리 기다려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결정적 심판의 소식이 없자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기에 이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이러한 질문을 하였을 때 거기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 중에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선생이 보내어 물어보라고 하였다면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세례요한도 별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내용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받으신 때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바로 다음입니다. 그 소문이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이미 제자들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예수님의 대답으로 다시 듣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질문을 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런 바쁜 상황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잠깐 기다려라’하시고 하시던 일을 계속하셨던 같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을 어느 정도 마치시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보고 들었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너의 선생에게 이야기해라. 소경이 보며, 절름발이가 걸으며.....”고 하셨습니다. 그 대답을 옥에서 전해들은 요한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에 대해 오해하지 못하도록 그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지자, 곧 오리라고 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고, 모든 자보다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역할이 구약 계시의 결론이라는 점에서 큰 자입니다.
성경은 그의 독특한 식생활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사명에 충실한 선지자였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약대 털옷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는데, 이것은 의식주 때문에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또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계시의 점진적 역사에서 구약 계시의 한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그것을 성급하게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시대를 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계획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요한의 깨달음도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례도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야의 자비와 은혜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메시야이심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가운데는 이러한 요한의 생각을 고쳐주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메시야는 엄중한 심판을 하실 분으로 오시기도 하셨지만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처주시고 돌아보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리고, 생각이 짧고, 때로는 주제넘게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지만 우리를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또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충성되이 여겨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 하는 의미에서 세례요한처럼 가장 큰 자이면서 점점 더 밝히 드러날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 눅 7:28 -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거기 성 삼위가 임재하심을 보았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라는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세례를 받으시는 성자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재하심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에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으시려 하시느냐고 하면서 세례 베풀기를 사양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로 쏠리는 것에 대해 자기의 제자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구약 계시가 지향하는 화살표의 끝이 예수님께 닿도록 하는 일에 혼신(渾身)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고 물었습니다. 여러 주석가들의 해석처럼 세례 요한에게 의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까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런 질문을 그들의 입에 넣어 주어 예수님께 보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그렇게만 보는 것도 무리입니다. 그 질문에는 어떤 차원에서건 세례 요한의 의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메시야인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메시야로서의 결정적 증거가 될 만한 어떤 것이 왜 없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메시야로서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 하시고 계시는 일이 다른 것이어서가 아니라 메시야 사역과 계시의 성격상 예수님께서는 우선하실 일을 하시고 계셨고 세례요한은 조금은 성급하게 심판의 메시야로서 결정적 역할을 기대하였기에 그런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친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증거 한 것을 보아 당시 유대인들처럼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메시야는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메시야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이 기대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악인에 대한 결정적이고 강력한 심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심판이 임박하였다고 증거 하였는데 자신이 부당하게 옥에 갇혔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보고를 제자들을 통해서 감옥에서 들었지만 악인에 대한 결정적 심판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왜 악인에 대한 심판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 일을 할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태도는 그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메시야를 오해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질문은 그의 메시야 이해의 한계를 보여준 것뿐입니다. 메시야는 심판자이심이 맞습니다. 그 메시야는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어 던지실 분입니다. 도끼로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찍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증거는 메시야 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장차 임할 심판이지만 임박하다고 한 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하는 것은 종말론적 긴장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그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사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만약에 회개가 없을 경우에는 심판은 지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악한 헤롯을 책망한 것 때문에 옥에 갇혔고 아무리 기다려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결정적 심판의 소식이 없자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기에 이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이러한 질문을 하였을 때 거기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 중에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선생이 보내어 물어보라고 하였다면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세례요한도 별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내용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받으신 때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바로 다음입니다. 그 소문이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통해 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이미 제자들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예수님의 대답으로 다시 듣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질문을 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런 바쁜 상황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잠깐 기다려라’하시고 하시던 일을 계속하셨던 같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을 어느 정도 마치시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보고 들었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너의 선생에게 이야기해라. 소경이 보며, 절름발이가 걸으며.....”고 하셨습니다. 그 대답을 옥에서 전해들은 요한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에 대해 오해하지 못하도록 그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지자, 곧 오리라고 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고, 모든 자보다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역할이 구약 계시의 결론이라는 점에서 큰 자입니다.
성경은 그의 독특한 식생활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사명에 충실한 선지자였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약대 털옷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는데, 이것은 의식주 때문에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또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계시의 점진적 역사에서 구약 계시의 한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그것을 성급하게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시대를 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계획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요한의 깨달음도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례도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야의 자비와 은혜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메시야이심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가운데는 이러한 요한의 생각을 고쳐주시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메시야는 엄중한 심판을 하실 분으로 오시기도 하셨지만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처주시고 돌아보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리고, 생각이 짧고, 때로는 주제넘게 하나님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지만 우리를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또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충성되이 여겨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 하는 의미에서 세례요한처럼 가장 큰 자이면서 점점 더 밝히 드러날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들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 눅 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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