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보다 취향을 중시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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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2-02-2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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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취향에 따라 피자를 먹을 수도 있고 빈대떡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음식 취향을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옷을 입는 것도 지나치게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한 역시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음악이나 연극이나 스포츠나 문화 일반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합니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를 수 있지만 또한 취향이 같은 사람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집단보다 개인을, 이념보다 취향을 중시하는 현대사조는 취향의 다수성과 관련된 다원주의를 형성하였습니다. 상식과 윤리와 도덕과 가치질서를 허물지 않는 한에서 다양하고 다원적인 것은 용납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 기준과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한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데는 하나의 ‘공통적인 지각’즉 상식(common sense)이 깔려 있다고 칸트는 생각하였습니다. 도덕적 규범이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이 상식, 즉 공통 지각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식은 의사소통의 조건이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기본요건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사조는 이러한 상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는 전통과 권위에 대한 암묵적 수용보다 비판적 반성과 논의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은 검증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할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 어떤 것도 이성적 검토 없이, 정당성에 대한 논거 없이 수용될 수 없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정당성과 확실성을 보증할 수 없는 것은 지식의 영역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 영역을 제외한 종교나 윤리도덕이나 이념이나 예술은 공적 의미 영역에서 쫓겨나 사적 의견의 문제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론 종교나 윤리도덕이나 예술이 당장 쓸모없게 된 것은 아니지만 합리성과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또한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이념과 신조까지 무시되고 있습니다. 개인이 어떤 종교를 가지든, 어떤 도덕적 규범을 따르든, 어떤 예술적 경향을 좋아하든 간에 그것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원주의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관용하는 것처럼 하는 종교가 되었고 “취향에 대해서는 논란하지 말라.”는 주장을 계명처럼 여깁니다. 이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문화는,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의 관할 권역이던 것이 인간의 자율적 관할 권역으로 전환되는 특징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전문 용어로는 ‘세속화’라고 말합니다. 세속화는 근대 문화가 유입된 곳이면 어느 곳에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통적 가치와 권위는 심각한 도전과 비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후 사상과 이념의 상대화는 걷잡을 수 없는 쓰나미처럼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영역까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동안 신앙, 이념, 문화, 정치, 세계관 같은 전통가치체계들은 객관적 진리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다원화’라고 부릅니다. 진리나 사상이나 전통적 가치는 감성적 개인주의 앞에 맥을 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취향은 단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주거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 뿐 아니라 독신으로 사느냐 결혼을 하느냐, 이성과 결혼할 것이냐 아니면 동성과 결혼할 것이냐, 장로교회를 다닐 것이냐 순복음교회로 나갈 것이냐, 큰 교회로 나갈 것이냐 작은 교회로 나갈 것이냐 하는 것까지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경향을 현대화 또는 세계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도가니”라는 소설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켜 국회에서 도가니 특별법을 제정하게 되었고 미국에서도 미성년 아동 성폭행 사건이 사회 문제가 되었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1990년대에 이런 문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졌습니다. 벨기에에서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그들을 상대로 포르노 비디오를 찍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 한 집단이 잡혔는데 그 단체에 경찰과 검찰과 정부고위 인사까지 연루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문제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사회 여론이 들끓을 때 당시 부수상이자 재무장관인 사람이 미성년자와 동성애 관계가 있다는 것이 폭로되어 정치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정치가는 자신이 상대한 남자는 미성년자가 아니었고 동성애 문제는 단지 개인의 취향 문제일 뿐 정치적 능력이나 행정 수행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동을 상업적으로 성폭행하고 죽이고 암매장한 사건과 부수상의 동성애 사건이 뒤섞인 국민 여론에서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포르노를 찍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죽여 암매장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와의 성행위조차 잘 못된 것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아동과의 성행위는 개인의 문제요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성애를 받아들인 사회는 아동과의 성행위도 개인문제와 취향의 문제로 취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미국이나 한국 사회 안에도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여러 번 보도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아직까지 동성애나 다원주의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성애나 다원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심각하게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 오염의 증거 중 하나는 교단의 특징이 없다는 것이고, 목회자들이 자기가 소속된 교단의 신학과 교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장로교회는 성경을 배우거나 가르칠 때 소위 감성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치우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개혁주의 신학과 교리로 울타리를 쳐 놓았습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속한 교단의 신학과 교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교단이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목회자의 취향에 따라 교단의 신학이나 교리는 무시되고 맙니다. 현대사조를 생각할 때 목회자가 상식을 설교하고 행복이나 형통을 파는 종교상인이 될 위험이 많고, 교인들은 취향에 따른 문화생활 정도로, 아니, 문화보다는 좀 더 깊다고 할 종교생활 정도로 신앙을 생각할 위험이 큽니다. 성경은 방대한 책이지만 그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예수의 주 되심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취향에 따라 목회해도 안 되고 취향에 따라 신앙생활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달아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의 주 되심과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원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동성애를 허용한 사회는 아동과의 성행위도 취향으로 취급하듯이 성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상식과 취향을 메시지로 전하고 받는 교회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무슨 주장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성경 안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뜻은 상식과 취향과 현대사조를 거스르며 진리로 나아가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성경 안으로 들어가는 능력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서 우리의 능력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롬 12:2 -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 기준과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한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 대상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데는 하나의 ‘공통적인 지각’즉 상식(common sense)이 깔려 있다고 칸트는 생각하였습니다. 도덕적 규범이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이 상식, 즉 공통 지각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식은 의사소통의 조건이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기본요건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사조는 이러한 상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는 전통과 권위에 대한 암묵적 수용보다 비판적 반성과 논의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은 검증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할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 어떤 것도 이성적 검토 없이, 정당성에 대한 논거 없이 수용될 수 없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정당성과 확실성을 보증할 수 없는 것은 지식의 영역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 영역을 제외한 종교나 윤리도덕이나 이념이나 예술은 공적 의미 영역에서 쫓겨나 사적 의견의 문제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론 종교나 윤리도덕이나 예술이 당장 쓸모없게 된 것은 아니지만 합리성과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또한 개인의 취향에 따라 그 이념과 신조까지 무시되고 있습니다. 개인이 어떤 종교를 가지든, 어떤 도덕적 규범을 따르든, 어떤 예술적 경향을 좋아하든 간에 그것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원주의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관용하는 것처럼 하는 종교가 되었고 “취향에 대해서는 논란하지 말라.”는 주장을 계명처럼 여깁니다. 이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문화는,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의 관할 권역이던 것이 인간의 자율적 관할 권역으로 전환되는 특징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전문 용어로는 ‘세속화’라고 말합니다. 세속화는 근대 문화가 유입된 곳이면 어느 곳에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통적 가치와 권위는 심각한 도전과 비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후 사상과 이념의 상대화는 걷잡을 수 없는 쓰나미처럼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영역까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동안 신앙, 이념, 문화, 정치, 세계관 같은 전통가치체계들은 객관적 진리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다원화’라고 부릅니다. 진리나 사상이나 전통적 가치는 감성적 개인주의 앞에 맥을 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취향은 단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주거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 뿐 아니라 독신으로 사느냐 결혼을 하느냐, 이성과 결혼할 것이냐 아니면 동성과 결혼할 것이냐, 장로교회를 다닐 것이냐 순복음교회로 나갈 것이냐, 큰 교회로 나갈 것이냐 작은 교회로 나갈 것이냐 하는 것까지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경향을 현대화 또는 세계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도가니”라는 소설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켜 국회에서 도가니 특별법을 제정하게 되었고 미국에서도 미성년 아동 성폭행 사건이 사회 문제가 되었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1990년대에 이런 문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졌습니다. 벨기에에서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그들을 상대로 포르노 비디오를 찍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 한 집단이 잡혔는데 그 단체에 경찰과 검찰과 정부고위 인사까지 연루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문제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사회 여론이 들끓을 때 당시 부수상이자 재무장관인 사람이 미성년자와 동성애 관계가 있다는 것이 폭로되어 정치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정치가는 자신이 상대한 남자는 미성년자가 아니었고 동성애 문제는 단지 개인의 취향 문제일 뿐 정치적 능력이나 행정 수행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동을 상업적으로 성폭행하고 죽이고 암매장한 사건과 부수상의 동성애 사건이 뒤섞인 국민 여론에서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포르노를 찍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죽여 암매장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와의 성행위조차 잘 못된 것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아동과의 성행위는 개인의 문제요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성애를 받아들인 사회는 아동과의 성행위도 개인문제와 취향의 문제로 취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미국이나 한국 사회 안에도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여러 번 보도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아직까지 동성애나 다원주의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성애나 다원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심각하게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 오염의 증거 중 하나는 교단의 특징이 없다는 것이고, 목회자들이 자기가 소속된 교단의 신학과 교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장로교회는 성경을 배우거나 가르칠 때 소위 감성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치우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개혁주의 신학과 교리로 울타리를 쳐 놓았습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속한 교단의 신학과 교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교단이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목회자의 취향에 따라 교단의 신학이나 교리는 무시되고 맙니다. 현대사조를 생각할 때 목회자가 상식을 설교하고 행복이나 형통을 파는 종교상인이 될 위험이 많고, 교인들은 취향에 따른 문화생활 정도로, 아니, 문화보다는 좀 더 깊다고 할 종교생활 정도로 신앙을 생각할 위험이 큽니다. 성경은 방대한 책이지만 그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예수의 주 되심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취향에 따라 목회해도 안 되고 취향에 따라 신앙생활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달아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의 주 되심과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원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동성애를 허용한 사회는 아동과의 성행위도 취향으로 취급하듯이 성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상식과 취향을 메시지로 전하고 받는 교회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무슨 주장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성경 안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뜻은 상식과 취향과 현대사조를 거스르며 진리로 나아가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성경 안으로 들어가는 능력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서 우리의 능력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롬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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