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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십자가는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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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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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 Morris 박사가 쓴 "고통의 문화-The Culture of Pain"라는 책에 의하면 국제 고통학회(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Pain)라는 모임이 있는데, 그 학회에서 고통 문제에 대한 권위자 14명으로 위원회를 만들어 고통이 무엇인지 정의를 하도록 위촉하였습니다. 그 위원회가 정의한 고통이란 “신체적 조직?실제적 혹은 가능한 파손과 관계하여 겪는 불쾌한 감각적 그리고 정서적 경험, 혹은 그러한 파손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서술되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의 자체가 이렇게 복잡한 것을 보면 고통을 정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고통이 심할 때 “송곳으로 꼭꼭 찌르는 것 같은”또는 “뼈를 깎는 것 같은”등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엄격하게 말하면 아픔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한 묘사이지 고통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 중에 따뜻함이나 시원함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이 좀 강하게 되면 따뜻함은 뜨거움으로, 시원함은 차가움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뜨거움이나 차가움이 더 강하게 되면 고통이 됩니다.

고통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적인 것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고통을 주는 원인을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것은 보아서 모든 동물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짐승이 느끼는 고통이 사람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하급 동물에게는 고통의 감각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식과 지능을 갖춘 고등 동물에게서 비로소 고통의 감각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지능적이고 의식 작용이 분명하면 할수록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더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괴로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짐승은 아파하기는 하지만 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짐승이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괴로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아픔과 괴로움은 다른 것으로 되어 있고, 영어에서도 pain과 suffering은 구별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픔은 육체적인 것으로 그리고 괴로움은 정신적인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아픔에 정신적인 괴로움이 개입되므로 고통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자극에 대하여 상황과 성격과 심리적 상태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고통의 정도와 질이 달라지고 반응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와 한가한 집에서 입은 상처로 인한 고통은 질과 정도가 다릅니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이 느끼는 고통도 다르고, 문화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미국인은 아픔을 비교적 담담하게 대하는 반면 아일랜드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하며, 이탈리아 인은 당장 고통을 피하려고 하고, 유대인들은 고통의 의미와 고통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고 합니다.

고통을 교리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불교에서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과 다는 동물이나 생물이 느끼는 고통을 구별하지 않겠지만 사실 그 차이는 천차만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모든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성경 욥기 5:7절에서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을 피우면 불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치 그와 같이 인생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당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쾌락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지만 고통은 누구나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입니다. 만약 고통이 선택적인 것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고통을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독일어로 고통은 Leiden으로 당한다(leiden)는 말과 같고, 영어에서도 수동적(passive)이라는 말과 고통(passion)이라는 말이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은 죽음보다 무서운 인류의 지배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살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요즘은 안락사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가를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고통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괴로운 것은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학적인 설명이 아니고 논리적인 설명지만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아담 때문에 모든 인류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억울해 하거나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창조의 질서요 영적 원리이며 하나님 나라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에 의하여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놓이게 되었고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을 원망한다고 해도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이 절망적입니다. 그리고 크게 보면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신학적으로 죄 때문이지만 구체적인 고통은 개인의 잘못 때문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고통당하는 사람을 더욱 괴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형형틀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악랄한 고문 기구였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고통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물론 주님의 죽으심과 고통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지만 십자가의 고통은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극치였습니다.

이런 설명이 가능하지 모르겠지만, 단순생물체일수록 고통의 감각이 발달하지 않아서 고통을 덜 느끼고, 의식과 지능이 높을수록 고통을 예민하게 느낀다는 이론이 맞는다면 주님은 지혜와 지싱식이 뛰어나시고 천사보다 탁월하시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복음 사역은 대속의 죽음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고난과 고통을 담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극한 고문 틀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십자가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진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하여 너희도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 다르게 표현하여 가르치신 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란 바로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 유명한 요 3:16절에서 말하는 사랑도 곧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저야 할 십자가는 곧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마 16:24, 갈 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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