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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의 “설교비평”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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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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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3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목회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984년 10월 1일에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까지 24년 동안 목회를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전도사로 7년, 단독목회로 24년을 합하면 31년을 설교를 해 오면서 딱 두 번 나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신학교 졸업반 설교 연습 시간에 담당교수이신 박윤선 박사님께 설교 비평을 받았고, 다른 한 번은 친구이자 당시 내가 섬기는 교회의 교인이며 합동신학교 구약학 교수였던 김영철 교수님으로부터 비평을 받았습니다.

설교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한국 교회의 통념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 설교자들은 좀처럼 자기 설교에 대한 비평을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도 그렇게 다르지 않은 상황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경직된 분위기는 설교를 비평하는 것도 어렵게 하거니와 설교자가 자기 설교에 대한 비평을 수용하는 것도 힘들게 하였습니다.

나는 목회 24년 동안 설교를 해 오면서 나의 설교에 대한 두 분의 비평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나의 설교에 대하여 “바른 설교라고 할지라도 설교자의 자세에 따라 사랑을 전할수도 있고 미움을 전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평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졸업반 설교 연습 담당 교수였던 박사님은 유난히도 비판적이었던 우리들에게 설교의 범위를 잠언을 본문으로 하여 “말에 대하여로”제한하셨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교수님의 의도를 지혜롭게(?) 간파하고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등의 본문으로 설교를 하였지만 나는 갈라디아서 2:11-14절을 본문으로 하여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석상에서 책망한 내용을 가지고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고 진리가 왜곡될 때에는 상대가 누구든 장소가 어디든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설교했습니다.

나의 설교는 겁 없고 철없이 원로 교수의 의도를 비난한 것이었습니다. 순간 모든 신학생들은 긴장했습니다. 나의 설교에 대한 원로 교수의 비판과 평가에 대한 호기심은 모든 신학생들을 더욱 긴장시켰습니다. 그러나 원로 교수가 나의 설교에 대한 평가를 한 문장으로 일갈할 때 나는 무림의 고수에게 급소를 얻어맞고 비명마저 토하지 못하고 꼬꾸라지는 건방진 칼잡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픈 경험은 나에게 양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철 교수님의 충고는 나에게 한 설교에서 너무 많은 것을 전하려는 욕심을 버리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이 두 분의 비평이랄까 충고를 내가 비록 잘 지키지는 못하지만 다시 들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늘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성령을 의지하여 설교한다지만 설교를 잘못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데 설교자들은 서로의 설교에 대하여 일체 말하지 않기로 단합이나 한 것처럼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입에 담는 것을 금기를 깨는 부담으로 느낍니다. 그 금기(?)를 깨고 잘못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평은 불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의 시누이 취급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나는 가끔 아내로부터 설교에 대한 잔소리도 듣고 동역자들로부터 격려의 말도 듣지만 그런 것들은 별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 설교자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설교비평을 하는 분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양의 샘터교회 담임목사인 정용섭 목사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나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분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지난 2004년부터 “기독교사상”이라는 잡지에 유명목사님들의 설교비평의 글을 연재해오고 있는데 최근에 그 글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누군가 해야 했지만 그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설교비평”을 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역사적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공개석상에서의 정치인들의 말 한 마디는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되고 평가되는데도 불구하고 실수를 거듭하는데 설교자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비평이나 충고를 들을 기회가 없었으니 그 설교가 얼마나 제멋대로였을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 목사님은 내로라하는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설교를 주술, 영적 결벽증, 선동, 영웅 이야기, 신학적 포즈, 그릇된 욕망, 감상주의, 역사 허무주의, 계몽, 행복을 파는, 은폐된 폭력, 큐티식, 토종, 성경해석학 박사의 해석 없는, 궁극적이지 않은 궁극적인 관심 등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 비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개혁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참 답답하고 막연했는데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은 헝클어진 실타래의 끝을 발견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설교 비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한국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에 대한 여러 신학자들의 비평이 아합의 선지자들처럼 여출일구 “칼빈에 버금가는”식의 비평 아닌 찬양일변도의 글을 읽고 부하가 치밀어 통탄을 했었는데, 정 목사님은 그분의 설교를 소녀의 연애일기 같은 센티멘털리즘이라고 비평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세속적 차원에서의 교인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설교를 교인들의 반응에 따라 평가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전문가의 평가도 전무한 이때에 그분의 설교비평은 그의 신학적 입장과 성경해석이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애정 어린 질책이 되어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비평하는 일이 자칫 일방적 비난이 되기 쉬운데 그분의 비평은 쓴 소리와 단 소리에 구별 없이 애정을 쏟고 있어 비평가로서의 탁월한 달란트를 지닌 것 같습니다. 인신공격 같은 저급한 논리도 없고 겸손한척 하는 말에 숨은 교만도 느낄 수 없어 비평받는 설교자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설교자들에게까지 자신의 설교를 발전시킬 수 있는 채찍이 될 것 같습니다. 그분에게는 말씀에 대한 열정과 설교자들이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을 도우려는 사명감과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와 용기와 예리함과 사려 깊음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의 바른 뜻을 드러내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한국교회 강단 설교에서 가려내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변질 되지 않은 순수한 말씀을 듣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성경해석은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만 말하고 그 이상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분에게 있어서 아쉬운 점은 성경이 말하지 않고 있는 데까지 매우 조심스러워 하기는 하지만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설교비평은 약장수의 논리 수준으로 전락한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설교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상당히 기여하리라 기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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