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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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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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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300-700년에 북아프리카지방의 주교였던 도나투스는 로마 교회의 부패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여 불법한 자들을 옹호하고 정의와 자비와 윤리와 도덕에 대하여는 가르치지도 않았고 설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 개인뿐 아니라 교회가 정의를 추구해야 할 책임의 토대를 허무는 교리를 만들기까지 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부유한 지주들을 옹호하였고 땅이 없는 가난한 토착민들은 권력자와 부자를 옹호하는 로마 교회를 비판하는 도나투스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도나투스파 교회는 그렇게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배교했던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성경적 교회를 세우려고 로마 교회와 싸웠습니다. 도나투스파 교회로 불린 그들은 교회회원의 성결, 교회훈련과 치리(Church Discipline)의 엄수, 지역교회의 자치독립, 문제의 여지가 있는 세례에 관하여는 재 세례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교회가 세상 권력인 황제와 손을 잡고 교회에 대한 지배권과 수위권을 주장해 올 때 단호히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고 지역교회의 자치와 독립을 주장하여 주후 311년에 도나투스파 교회로 완전한 분리를 단행하였습니다. 도나투스파 교회가 로마 교회와 제국과의 대립이 깊어지자 주후 411년에 칼타고에서 그 문제 해결을 위한 교회회의가 열렸지만 도나투스파 교회에게 불리하게 끝났습니다. 주후 414년에는 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가 강력하게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고 도나투스파를 반대하는 것을 제국의 방침으로 선포하였고, 415년에는 도나투스파의 집회에 출석하는 자를 사형에 처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도나투스파의 사람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과 숲이나 동굴 속에서 집회를 가졌고, 혹은 스페인이나 북부 이태리로, 혹은 알메리아 지방으로 피하여 그 곳에서 자신들의 성경적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도나투스파의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이 몰려오자 진리가 상실되고 권위와 조직만을 앞세운 로마 가톨릭교회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말았습니다. 모하메드가 등장하고 이슬람이 몰려올 때 도나투스파는 그들과 합류하여 권력을 가진 지주들을 살해하고 그들을 지지하던 교회를 파괴하였습니다. 그 때 이후 북 아프리카의 전 지역은 이슬람화 하고 말았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슬람이나 도나투스파의 등장이 자신들의 잘못 때문임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시나리오는 교회사를 통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 절정은 칼 마르크스를 통한 공산주의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정의와 사랑에 실패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그릇된 교리와 권위를 앞세운 것은 도나투스나 이슬람이나 공산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는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생겨난 것도 98%가 넘는 가톨릭 신자를 자랑하는 나라가 정치와 경제에서 정의와 사랑에 실패한 것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도나투스 같은 이단의 출현이나 이슬람이나 공산주의가 발생하게 된 토양은 타락한 기독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나투스파를 비롯한 이태리 북부 지방에서 나타난 몬타누스(Montanists AD172-251년), 역시 이태리 지방에서 나타난 노바티안파(Novatians AD251-450년) 등 수많은 이단들이 발생하였지만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부패한 기독교 신앙의 토양에서 자라난 순수와 정의와 사랑을 표방했던 운동들이 실패한 원인은 전도서 기자가 지적한 대로 지나치게 의인 되려 했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 하는 것과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려 하는 것은 상식과 합리성과 논리를 과대평가한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논리와 합리성은 진리 안에서는 유용하지만 진리의 보루(堡壘)는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과 정의와 전능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나 5만 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갓 난 어린아이들도 많았습니다. 리스본은 알폰소 3세에 의해 1243년에 수도가 되었고 그 뒤 대항해 시대의 포르투갈 전성기가 리스본을 중심으로 꽃 피었습니다. 그 후 15세기 중엽부터 해외 식민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재물들로 인해 리스본은 대도시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1755년의 대지진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식민 통치를 통한 수탈을 일삼은 포르투갈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갓 난 어린아이들의 희생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불란서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을 수 있는가 하고 기독교를 야유하였습니다.

20세기의 철학자 럿셀 같은 사람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통해 죄 없는 아이들이 죽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직접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또한 죽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철학자들의 의문일 뿐 아니라 우리들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의인이 고난 받는 것 때문에 미끄러질 뻔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상식적 판단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에 굴복시켜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구체적인 가르침은 천국에 대한 가리지 비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생각하지만 주님은 수많은 천국 비유에서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이 땅에 임한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은 세상과 천국이 함께 하는 천국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천국을 사람들은 쉽게 납득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밭에 자라는 가라지를 그냥 두라하심을 우리는 납득하지 못하여 분노하며 주님보다 앞서 행동하려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 두 가지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첫째는 천국에 대한 상식적 이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라지가 있다는 사실을 주님도 알고 계시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천국을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상식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인내해야 합니다. 추수 때, 즉 세상 끝 날에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단으로 묶어 불사를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어떤 이들의 오해와 같이 정의와 윤리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으로 더욱 분발하여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 전도서 7:1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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