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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유용성만큼이나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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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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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에 의하면 돈이 생기기 전에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한계가 있었습니다. 농사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오랫동안 곡식을 계속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을 생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자 소위 “썩지 아니하는 소유”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썩지 아니하는 소유인 돈이 생겨서 인간은 무한대의 욕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의 원인도 화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돈이 많으면 욕심이 줄어들 것 같은데 돈이 많을수록 욕심이 더 커집니다. 옛날에는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많았지만 요즘은 돈으로 안 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돈의 가치와 그 위력의 유혹에 약한가 봅니다.

재벌 그룹의 총수가 감옥에 가는 이유도 돈 때문이고, 국회의원이 감옥에 가는 이유도 돈 때문이고, 대학들에서도 이사들과 교수들, 그리고 학생들까지 싸우는 이유가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사학법 개정의 문제도 들여다보면 거기 돈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은 대학들도 아주 상업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대학은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물질적 소득의 대상으로 봅니다. 특히 기독교 학교에서도 그런 경향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신학교도 그런 경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신학교마다 목회학 박사 과정이 있고, 목사님들 중 많은 분들이 목회학 박사 학위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학 박사 과정은 목회자들을 계속 공부하게 하고 사역을 위한 달란트를 개발하려는 뜻에서 시작된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순수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신학교는 재정이 필요하고 목사님들은 소위 감투(?)가 필요하여 세속적용어로 표현하면 궁합이 맞아서 생겨난 것이 목회학 박사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교회도 돈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산이 많거나 재정이 많은 교회일수록 문제가 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많은 부분이 돈 때문입니다. 교회의 돈은 목사의 돈도 아니고 장로의 돈도 아니고 교인의 돈도 아니고 하나님의 돈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모두가 그 하나님의 돈을 탐내고 생색을 내고 기득권을 행사하려고 하고 또 싸우기도 합니다.

LA의 어느 큰 교회에 목사님이 은퇴를 하고 후임 목사님이 부임을 하였습니다. 은퇴하신 목사님은 원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정 문제로 인하여 분쟁이 생겼는데 교인들이 원로 목사님 측과 담임 목사님 측으로 갈라져서 싸우다가 교회가 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원로 목사님 측 교회에는 새로운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왔습니다. 갈라진 두 교회가 법정 소송까지 가게 되었는데 법정 싸움에서 한 번은 담임목사님 쪽이 이기고 한 번은 원로 목사님 쪽이 이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법원은 교회 재산을 두 교회가 동등하게 나누어 가지라고 권고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원로 목사님은 또 하나의 제 삼의 교회를 등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셋이니까 재산을 세 몫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청원을 법원에 제출하였던 모양입니다. 그 교회의 싸움을 지켜볼 때 모든 주장들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결국은 돈에 대한 욕심이 문제를 크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원로 목사님은 노회에서 회원권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교단의 원로였는데 그 일 때문에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바라볼 때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경제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물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오해와 오용의 위험도 또한 대단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존을 위해 물질이 필요합니다. 물질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물질입니다. 그런데 물질은 그 것 자체로 매우 위험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거의 모든 중요한 것은 그 중요성만큼 위험성도 높습니다.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중요한 물, 불, 공기, 오일, 돈은 그것의 중요한 만큼 위험성도 큽니다.

오늘날만큼 돈의 위력이 컸던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돈을 좋아하고 또한 필요로 합니다. 대통령도 돈이 있어야 하고, 국회의원도 돈이 있어야 하고, 교수도 돈이 있어야 하고, 목사도 돈이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돈은 필요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하지만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합니다. 재판에서 이기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재판에서도 정당하고 옳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유능한 변호사를 돈으로 살 수 있느냐에 따라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합니다. 법정 싸움에서 개인이 아무리 정당해도 집단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돈의 위력 때문입니다. 환자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병원을 상대로 재판을 하여 이긴다는 것이 어렵고, 회사원이 회사를 상대하여 재판하여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옳고 정당해도 돈이 없어 재판에서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전직 교수가 현직 판사를 석궁으로 쏘아서 사회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일로 그 전 직 교수가 체포되었는데, 기자가 왜 그랬느냐고 묻자 ‘국민의 이름으로 판사를 처단하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교수는 바른 주장을 하다가 교수 재임용에 탈락되었고, 거기에 대한 합법적 투쟁이 번번이 묵살되자 판사에게 석궁을 쏘아 사회를 경악케 하였습니다. 대학교수가 학교 당국을 상대로 싸워 이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도 순전히 돈의 폭력 앞에 개인이 무력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피해를 당한 당사자의 참담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판사에게 석궁을 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일은 그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식의 수준을 보여주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경종이 되어 있는 자들이 돈이나 권력의 폭력을 자제하게 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하면 좋겠지만 모든 나쁜 사건이 그렇듯이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으로 작용하여 사람들이 그런 일을 안 당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될 위험이 높습니다. 돈의 위력과 폭력 앞에 사람들은 절제하려 하기보다 더욱 더 물질에 대한 탐심을 갖게 되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탐심을 이용한 경제 제도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옛말에 “일꾼에게 ‘날일’을 시키면 눈 빠질까 겁나고 ‘돋내기’를 시키면 죽을까봐 겁난다.”고 하였습니다. ‘날일’이란 시간만 때우면 되니까 해지기를 바라 자꾸 해만 쳐다보아 눈 빠질까 겁이 나고, ‘돋내기’란 일정량의 일을 끝내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놀아도 되는 책임제니까 지나치게 열심히 일을 해서 죽을까 겁이 날 정도라는 것입니다.

생산력의 발전과정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의 노동은 ‘날일’이 되어 실패했고, 자본주의의 폐해는‘돋내기’식 노동 때문입니다.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도 공산주의의 ‘날일’식 노동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는데 자본주의의 돋내기식 노동방식을 도입한 이후 생산력이 몇 배로 늘어났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여져서 좋은 점이 많겠지만 물질이나 돈이 많아질 때 그 자체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 안에서 정당하게 돈을 벌어 바르게 쓰면 괜찮다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워낙 교회 안에서도 돈이 문제가 되니까 이런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주장은 김동호 목사님의 [청부론](淸富論)이라는 책을 통해 주장되고 있습니다. 신자는 정직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떼고, 가난한 사람의 몫도 떼고, 나머지는 마음껏 누려도 된다는 식의 주장입니다.

신자는 깨끗하게 돈을 벌어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라고 제안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목표 설정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는 것이지 청부(淸富)를 향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어느 정도의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 설정이 잘못되었고 또한 부자들에게 선을 행하지 않는 죄에 대한 면죄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청부론에 대한 반론으로 나온 책이 김영봉 목사님이 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자의 청빈한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세말로 하면 청부론은 물질에 대해 긍정적이고 청빈론은 부정적입니다. 두 분의 주장은 비록 다른 관점에서이지만 그릇된 물질주의를 질타하는 면에서 상당히 공헌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 분의 주장 모두 바른 성경의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청부론은 절제의 책임보다는 누림의 권리에 무게를 둔 이론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는 자만심으로 인하여 더 큰 윤리적이고 도의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게 할 수 있는 주장이기 때문에 나는 경계합니다.

반면에 김영봉 목사님이 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의 주장인 청빈에는 다분히 수도원적인 금욕주의 경향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어 경계합니다. 가난이란 게으르고 나태한 생활 때문에 겪는 가난이 있고, 사회적 환경 때문에 겪는 가난이 있습니다. 사회적 환경 때문에 겪는 가난은 위로와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지만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은 전적으로 위로만 할 수 없는 가난입니다. 원인이야 어떻든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동정해야 하지만 게으름은 악한 것으로 성경이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13-21절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조건에서 풍작으로 인하여 재물이 늘어났는데도 그 불어난 부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물질은 많을수록 그 위력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은 물질이 옛날보다 더 풍족해졌고 물질의 필요와 효용성도 극대화되었기 때문에 위험성도 그만큼 커졌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신자에게 부자 되는 것 자체가 올무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즉 착하게 돈을 벌어도 크게 부자가 되면 바보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돈은 그만큼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브루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청부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내가 그 책을 좋아하지 않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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