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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고상한 이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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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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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는 참 나쁜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나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나 국가나 국가 사이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문제는 이기주의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기주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욕망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고 욕심이 자라서 죄가 되고 죄가 자라면 사망에 이른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욕심은 무엇을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욕심이란 그 자체로 이미 지나친 것이니까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니까 나쁘지만 욕망이 없으면 아무런 발전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보들에게는 욕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보는 발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욕망은 이기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어느 시대에서나 이기주의가 문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제국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국가나 사회나 교회나 가정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는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기주의가 집단적이 되면 명분을 갖게 됩니다. 물론 명분 자체가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복잡하고 심각합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집단의 이기심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입니다. 그에 주장에 의하면 개인은 어느 정도의 양심이나 염치가 있어서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집단은 그럴 양심도 염치도 없을 뿐 아니라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집단 이기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입니다. 국가는 아무리 이기주의가 되어도 그것이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됩니다.

요즘은 교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집단적 이기주의가 나쁜 것은 개인의 순수하고 비이기적인 충성심을 집단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자기의 순수한 충성이 집단의 이기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어도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국가 간의, 집단 간의 이기심 때문에 갈등은 점점 심화되는 것입니다.

욕망 때문에 사람은 이기적이 되고 집단도 이기적이 됩니다. 그렇다고 욕망 旻섯?없앨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없다면 생육도 불가능할 것이고 문명도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욕망도 주셨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이기주의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욕망이 이기주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이타적인 욕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가 좋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은 명분이야 어찌되었건 이기적인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칸트 같은 철학자가 의무주의를 내 세운 것도 결국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해보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선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이니까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칸트의 친구가 칸트를 놀리는 시를 썼다고 합니다. 즉 그 시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윤리적인 사람인가. 내 양심이 아프다.”칸트의 의무론은 사랑하는 것까지 이기적인 것이 되고 비윤리적인 것이 될 위험을 경계하였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 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받는 복이고 둘째는 주는 복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거저 받은 것입니다. 신자는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것이 신자의 의무인데 성경은 주는 것을 의무로만 규정하지 않고 그것을 복이라고 하였습니다(행 20:35).

우리는 받는 것만 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말씀의 실천이 어려운 것은 그 말씀이 우리의 상식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고 베푸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보답이기 때문에 또 다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무와 책임을 잘 하면 거기에 대해 또 보상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여 헌금을 드리고 은혜를 베풀고 나누어주면 그것에 대해 또 보상을 해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의인은 줄 수 있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공급해 주십니다. 또한 거저 주라 하심은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말고 주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선행을 할 때 비록 물질적인 보상은 바라지 않는다고 하지만 명예와 인기와 칭찬을 바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바라고 하면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주어야 합니다.

한국에 KBS 복지재단이 있습니다. 강태옹이라는 분이 200억을 기부하고 KBS에서 30억을 내놓아서 만든 재단입니다. 그분은 이북에서 월남하여 악착같이 돈을 벌어 그 엄청난 돈을 KBS 복지재단에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돈 있는 분들이 찾아와서 KBS 복지재단에 돈을 기부하겠다고 하다가 강태옹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부를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KBS라는 이름은 상관없는데 강태옹이라는 이름으로 된 재단에는 기부하기를 꺼렸습니다. 강태옹 이라는 이름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어주면 기부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와 비교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가 빌 게이츠이고 두 번째 부자가 워런 버핏입니다. 그런데 버핏이 자기 재산의 85%인 370억 달러를 복지재단에 기부를 했는데 자기 아들이 하는 복지재단에 70억 달러를 주고 300억 달러를 빌, 멜린다 게이츠재단에 기부를 했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 부자가 첫째 부자의 복지재단에 그 엄청난 재산을 기부했습니다. 빌, 멜린다 게이츠재단의 전 재산이 270억 달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버핏은 300억 달러를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더 큰 재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핏의 말은 자기가 지켜보니까 빌 게이츠가 돈을 잘 쓰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것보다 잘 할 것 같아서 기부했노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지만 버핏의 미담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이야 말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거액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된 복지재단에 기꺼이 기부하는 것을 보아 다른 속셈이 있다고 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빌 게이츠는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많은 돈을 교육기관에 기부해왔지만 지금 그의 재단이 중점적으로 하는 사업은 말라리아와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2008년도에 은퇴를 하고 은퇴 후에는 자선사업가로 살 모양인데 얼마나 부럽고 또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인은 선행을 하면서도 정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을까요? 선행이 의무와 책임이라는 면에서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행에 대해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보상을 안 해주셔도 그만인데 후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바라봅니다. 사람에게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안 되지만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허용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보상을 기대해도 좋은 것입니다. 칸트의 의무론은 보상을 바라는 선행을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괜찮다고 하십니다. 의인은 사람에게 보상을 바라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보상은 기대합니다.

그래서 의인의 선행은 거저 주기 때문에 고상하고 하나님께 상을 바라기 때문에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기주의는 아무리 많아도 좋을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니까 이기주의인데 남에게 유익을 주는 이기주의니까 고상한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주의자입니다. 기왕에 이기주의라면 신자는 고상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아무에게도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보상을 바라는 고상한 이기주의자가 많은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 누가복음 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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