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을 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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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3-08-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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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 가장 몹쓸 병의 특징은 자각 증세가 없는 병입니다. 암이 난치병인 까닭은 자각하게 되면 이미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을 치료하려면 초기에 발견해야 하는데 암은 초기에 자각 증세가 없어서 발견하기가 어렵고 발견하게 되면 이미 치료의 기회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암은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고 차선은 초기에 발견하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했지만 암은 역시 난치병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과학의 발전이 암을 발생시키는 요인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암은 병명(病名)이기도 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암”이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에도 현대 기독교에도 발생 초기에 자각 증세가 없는 암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이 율법주의로 바뀌어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암과 같습니다. 율법이 율법주의가 되면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개들을 삼가라”는 매우 격한 권면의 말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거친 표현을 하게 된 것은 개들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하였는데, 여기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과 몸을 상해하는 자들은 세 종류의 이단들이 아니라 한 종류를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울이 “개들”이라고 한 유대 기독교인들인 할례파들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도 사람을 개라고 하는 것은 매우 심한 욕이지만 유대 문화에서는 우리 문화에서보다 훨씬 더 치욕스럽고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할례파들을 “개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지만 사소한 문제에서 조차 융통성이 없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모데가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서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유대인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할례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할례파들이 할례를 복음에 첨가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할례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다. 거기다가 할례를 하나 더 첨가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완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복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낸 것입니다. 할례파들의 이런 주장에 빌립보교인들이 흔들리게 된 것은 그 주장이 상당할 정도로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 유대교에서 나왔습니다. 유대교가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입니다. 그 유대교가 그렇게도 강조하여 가르치고 지켜왔던 율법과 할례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고 바울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리보교인들은 할례파들의 그 같은 주장에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이런 문제를 오늘날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요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주장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현대의 혼합주의가 바로 초대교회의 할례파들의 주장과 같습니다. 혼합주의는 기독교 복음을 “꿩 먹고 알 먹기식”으로 바꿔놨습니다. 할례파들은 할례를 지켜도 복음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가 아주 묘합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금송아지를 의지하고 믿음보다 할례에 치우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복음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와 부활생명을 구체적인 숫자나 프로그램으로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요 율법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공허하게 느낍니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헌금하는 것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삼천 번제”의 헌금이 생겨나고 심지어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마련했다는 별미를 인용해서 “별미헌금”이라는 항목도 등장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한국판 할례파들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을 개들이라고, 육체를 자랑하는 이들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새벽기도를, 금식기도를, 선교를,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부활생명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 열심히 하는 이들은 믿음 좋은 성도, 그런 것 잘 못하는 이들은 믿음 약한 성도로 구분합니다. 물론 믿음 좋은 신자는 그런 것도 잘합니다. 믿음 약한 신자는 그런 것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그런 것 잘 하는 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율법 외의 많은 의무까지 추가하여 철저하게 지키는 이들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대기독교인들, 할례파들이 복음을 왜곡하였고 지금은 혼합주의자들이 기도, 헌금, 선교, 봉사 많이 하는 것으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여 복음을 왜곡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당연히 기도, 선교, 전도, 헌금, 봉사 같은 것을 많이 하고 잘 해야 합니다. 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복음에 첨가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함정의 위험이 많습니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대로 보수주의는 보수주의대로 은사주의자들에게도 위험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에게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합니다. 주 안에 서라는 것은 복음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 기독교인의 신앙의 덕목을 몇 가지 열거하다가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하였습니다. 무슨 덕이나 무슨 기림에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수 백 가지 은사와 덕목이 다 포함됩니다. 방언, 예언, 병 고침, 지식, 구제, 인내, 절제, 온유, 기도, 선교, 헌금, 봉사, 충성, 희생 그 외에 어떤 덕목이나 은사가 있다 해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들”입니다. 이것들이란 바울이 말한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것들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을 때 전했던 복음, 설교와 가르침과 몸소 실천해 보였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빌립보 교회가 바로 그 문제로 인하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그것을 위기로 느끼지 못합니다. 자각 증세가 없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할례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잘못해서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자신의 신앙적인 업적을 의지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이상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비슷하게 벌어집니다.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초대교회의 할례와 율법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합니다. 그래서 바울 당시에도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할례와 토라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할례파들에게는 진정성도 있고 실제적인 삶도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주장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요즘도 일천번제, 별미헌금, 특새(특별새벽기도), 온갖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선교, 전도, 봉사, 충성, 헌신을 선정적으로 강조합니다. 구제, 교육, 사회사업 등에 관심을 보이면 살아 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복음에다 그런 것을 첨가하는 것입니다. 헬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즘도 별 희한한 것들을 복음에다 다 섞어 놓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이상한 체험을 강조합니다. 입신을 한다고 하기도 하고 점쟁이처럼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온갖 병을 고치고 이상한 현상들을 일으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 중 지식이 높은 이들은 기독교를 사회운동이나 이념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복음을 정의와 공평과 윤리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것들 중에는 바른 신앙의 차원에서도 칭찬할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요소들이 복음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파들의 문제는, 할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 받는 것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만으로는 안 되고 할례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다는 말인가 라고 사람들은 당혹스러워 합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또 잘못되었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보석 감정사라고 하더라도 보석의 진위를 구별하려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도 그런 것입니다. 척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깨달으려면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보석감정사들이 받는 훈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보석을 계속 경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위폐 감정사의 훈련 과정 중에는 진폐를 늘 만지고 비비고 비쳐보고 냄새 맡고 하는 과정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짜를 알려면 진짜 경험이 필수적입니다. 가짜를 접하기 전에 진짜부터 경험해야 합니다. 가짜를 먼저 경험하면 진짜를 분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사람에게는 먼저 들어온 지식이 나중 들어 온 지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진 이들이 거기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왜곡하는 개들을 삼가고 참 복음의 경험에 힘써야 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 빌 3:2 -
초기 기독교에도 현대 기독교에도 발생 초기에 자각 증세가 없는 암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이 율법주의로 바뀌어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암과 같습니다. 율법이 율법주의가 되면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개들을 삼가라”는 매우 격한 권면의 말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거친 표현을 하게 된 것은 개들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하였는데, 여기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과 몸을 상해하는 자들은 세 종류의 이단들이 아니라 한 종류를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울이 “개들”이라고 한 유대 기독교인들인 할례파들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도 사람을 개라고 하는 것은 매우 심한 욕이지만 유대 문화에서는 우리 문화에서보다 훨씬 더 치욕스럽고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할례파들을 “개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그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지만 사소한 문제에서 조차 융통성이 없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모데가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서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유대인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할례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할례파들이 할례를 복음에 첨가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할례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다. 거기다가 할례를 하나 더 첨가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완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복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낸 것입니다. 할례파들의 이런 주장에 빌립보교인들이 흔들리게 된 것은 그 주장이 상당할 정도로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 유대교에서 나왔습니다. 유대교가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입니다. 그 유대교가 그렇게도 강조하여 가르치고 지켜왔던 율법과 할례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고 바울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리보교인들은 할례파들의 그 같은 주장에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이런 문제를 오늘날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요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주장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현대의 혼합주의가 바로 초대교회의 할례파들의 주장과 같습니다. 혼합주의는 기독교 복음을 “꿩 먹고 알 먹기식”으로 바꿔놨습니다. 할례파들은 할례를 지켜도 복음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가 아주 묘합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금송아지를 의지하고 믿음보다 할례에 치우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복음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와 부활생명을 구체적인 숫자나 프로그램으로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요 율법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공허하게 느낍니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헌금하는 것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삼천 번제”의 헌금이 생겨나고 심지어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마련했다는 별미를 인용해서 “별미헌금”이라는 항목도 등장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한국판 할례파들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을 개들이라고, 육체를 자랑하는 이들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새벽기도를, 금식기도를, 선교를,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부활생명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 열심히 하는 이들은 믿음 좋은 성도, 그런 것 잘 못하는 이들은 믿음 약한 성도로 구분합니다. 물론 믿음 좋은 신자는 그런 것도 잘합니다. 믿음 약한 신자는 그런 것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그런 것 잘 하는 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율법 외의 많은 의무까지 추가하여 철저하게 지키는 이들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대기독교인들, 할례파들이 복음을 왜곡하였고 지금은 혼합주의자들이 기도, 헌금, 선교, 봉사 많이 하는 것으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여 복음을 왜곡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면 당연히 기도, 선교, 전도, 헌금, 봉사 같은 것을 많이 하고 잘 해야 합니다. 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복음에 첨가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함정의 위험이 많습니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대로 보수주의는 보수주의대로 은사주의자들에게도 위험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에게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합니다. 주 안에 서라는 것은 복음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 기독교인의 신앙의 덕목을 몇 가지 열거하다가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하였습니다. 무슨 덕이나 무슨 기림에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수 백 가지 은사와 덕목이 다 포함됩니다. 방언, 예언, 병 고침, 지식, 구제, 인내, 절제, 온유, 기도, 선교, 헌금, 봉사, 충성, 희생 그 외에 어떤 덕목이나 은사가 있다 해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들”입니다. 이것들이란 바울이 말한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것들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을 때 전했던 복음, 설교와 가르침과 몸소 실천해 보였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빌립보 교회가 바로 그 문제로 인하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그것을 위기로 느끼지 못합니다. 자각 증세가 없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할례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잘못해서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자신의 신앙적인 업적을 의지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이상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비슷하게 벌어집니다.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초대교회의 할례와 율법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합니다. 그래서 바울 당시에도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할례와 토라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할례파들에게는 진정성도 있고 실제적인 삶도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주장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요즘도 일천번제, 별미헌금, 특새(특별새벽기도), 온갖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선교, 전도, 봉사, 충성, 헌신을 선정적으로 강조합니다. 구제, 교육, 사회사업 등에 관심을 보이면 살아 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복음에다 그런 것을 첨가하는 것입니다. 헬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즘도 별 희한한 것들을 복음에다 다 섞어 놓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이상한 체험을 강조합니다. 입신을 한다고 하기도 하고 점쟁이처럼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온갖 병을 고치고 이상한 현상들을 일으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 중 지식이 높은 이들은 기독교를 사회운동이나 이념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복음을 정의와 공평과 윤리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것들 중에는 바른 신앙의 차원에서도 칭찬할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요소들이 복음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파들의 문제는, 할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 받는 것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만으로는 안 되고 할례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다는 말인가 라고 사람들은 당혹스러워 합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또 잘못되었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보석 감정사라고 하더라도 보석의 진위를 구별하려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복음도 그런 것입니다. 척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깨달으려면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보석감정사들이 받는 훈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보석을 계속 경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위폐 감정사의 훈련 과정 중에는 진폐를 늘 만지고 비비고 비쳐보고 냄새 맡고 하는 과정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짜를 알려면 진짜 경험이 필수적입니다. 가짜를 접하기 전에 진짜부터 경험해야 합니다. 가짜를 먼저 경험하면 진짜를 분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사람에게는 먼저 들어온 지식이 나중 들어 온 지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진 이들이 거기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왜곡하는 개들을 삼가고 참 복음의 경험에 힘써야 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 빌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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