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내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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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3-08-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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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세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 있게 대답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안 믿는다고 할 수가 없어서 자신은 없지만 믿는다고 대답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내세의 존재 자체를 아예 믿지 않는다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내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예수님은“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하셨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게 하셨는데 이 역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고 최후심판도 내세 신앙이 아니면 결코 납득될 수 없는 교리입니다. 무엇보다 내세 신앙의 가장 결정적인 토대는 부활신앙입니다. 바울은“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고 하였습니다. 이 부활 신앙으로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내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없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고 허무하겠습니까? 바울은 만약 내세가 없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특히 이웃과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옛날 미국의 흑인 노예들 중에는 그 삶이 견딜 수 없이 고달팠지만 내세에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고 견딘 이들이 많았고, 교회 역사에서 많은 이들은 순교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내세가 없는 기독교 신앙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내세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현세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한다고 하여 내세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세 자체를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내세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민주화, 경제정의, 생태 보호, 정의와 평등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내세를 부인하는 이들은 기독교의 신앙의 토대를 철저하게 현세에 놓으려 합니다. 이러한 주장도 나름대로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대체적으로 내세보다는 현세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세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닐 뿐 아니라 무지요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 성격과 내세적 성격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처소를 마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내세가 결정될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목사님은 내세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과 대답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 모두에게 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질문에 앞서 내세가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세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현제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이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내세를 말한다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 세상을 움직이는 생명의 힘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이 그것들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것을 다 파악하고 난 후에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현세를 아는 사람은 현세의 한계와 허무를 알게 되며, 따라서 내세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궁극적인 생명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 생명은 현세의 생명이 생물학적으로 연장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해서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셔서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죽음이 침범할 수 없는 생명을 덧입혀주실 것입니다. 내세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그런 생명이 가득한 세계일 것입니다. 내세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서 일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역연혼(逆緣婚, 兄死娶嫂婚 Levirate)에 관해 질문하였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순수하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신명기 25장 5절의 모세의 율법을 들어 예수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결혼해서 살다가 아이를 낳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형제들과 결혼하는 제도를 역연혼 또는 형사취수혼이라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는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부부로 살다가 죽었고,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 경우 부활 때에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려는 질문인데, 내세를 세상의 기준으로 상상한 어린아이와 같이 나이브한 질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어떤 사람은 금면류관을, 어떤 사람은 개털모자를 받아쓰게 된다거나,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은 하늘나라 맨션에, 인색했던 사람은 초라한 집에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일종의 주식투자나 보험가입처럼 이해합니다.
일곱 명의 남자와 살았던 여자가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과 하늘나라에서 보상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은 내세를 단순히 이 세상이 연장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삶이란 결혼하고 자식 낳고 돈을 벌고 영화를 누리고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처럼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내세에서의 삶의 의미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내세에는 형 동생, 목사 평신도, 부자 가난한 자, 미인과 추인, 학자와 무식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대통령과 노숙자의 차별이 이 세상에서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변화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내세의 삶을 무료(無聊)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을, 또는 자식이 잘난 것을 자랑도 하고, 경쟁에서 이기고, 돈 버는 재미가 삶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더 좋고 높고 나은 삶을 살려는 욕망이 삶의 에너지가 되고 문명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마르쿠제는 “문명과 에로스”에서 설파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움직이는 에너지이고 이치입니다.
하지만 내세, 즉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이 세상의 삶과 생명 형식으로 저 세상의 생명까지 재단하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구약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는데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그가 어떤 실존에 처하든지 살아있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삶의 내용이 없으면 죽은 것이었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죽음도 삶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생명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아 믿고 살아야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지 않고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믿음과 의식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좀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자연을 무리하게 파손하지 않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고, 가난한 나라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 시각으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 눅 20:38 -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내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없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고 허무하겠습니까? 바울은 만약 내세가 없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특히 이웃과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옛날 미국의 흑인 노예들 중에는 그 삶이 견딜 수 없이 고달팠지만 내세에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보고 견딘 이들이 많았고, 교회 역사에서 많은 이들은 순교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내세가 없는 기독교 신앙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내세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현세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한다고 하여 내세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세 자체를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내세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민주화, 경제정의, 생태 보호, 정의와 평등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내세를 부인하는 이들은 기독교의 신앙의 토대를 철저하게 현세에 놓으려 합니다. 이러한 주장도 나름대로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대체적으로 내세보다는 현세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세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닐 뿐 아니라 무지요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 성격과 내세적 성격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처소를 마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내세가 결정될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목사님은 내세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과 대답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 모두에게 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질문에 앞서 내세가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세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현제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이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내세를 말한다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 세상을 움직이는 생명의 힘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이 그것들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것을 다 파악하고 난 후에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현세를 아는 사람은 현세의 한계와 허무를 알게 되며, 따라서 내세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궁극적인 생명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 생명은 현세의 생명이 생물학적으로 연장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해서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셔서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죽음이 침범할 수 없는 생명을 덧입혀주실 것입니다. 내세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그런 생명이 가득한 세계일 것입니다. 내세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서 일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역연혼(逆緣婚, 兄死娶嫂婚 Levirate)에 관해 질문하였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순수하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신명기 25장 5절의 모세의 율법을 들어 예수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결혼해서 살다가 아이를 낳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형제들과 결혼하는 제도를 역연혼 또는 형사취수혼이라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에는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부부로 살다가 죽었고,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 경우 부활 때에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려는 질문인데, 내세를 세상의 기준으로 상상한 어린아이와 같이 나이브한 질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어떤 사람은 금면류관을, 어떤 사람은 개털모자를 받아쓰게 된다거나, 충성을 많이 한 사람은 하늘나라 맨션에, 인색했던 사람은 초라한 집에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일종의 주식투자나 보험가입처럼 이해합니다.
일곱 명의 남자와 살았던 여자가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과 하늘나라에서 보상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은 내세를 단순히 이 세상이 연장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삶이란 결혼하고 자식 낳고 돈을 벌고 영화를 누리고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처럼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내세에서의 삶의 의미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내세에는 형 동생, 목사 평신도, 부자 가난한 자, 미인과 추인, 학자와 무식자, 높은 자와 낮은 자, 대통령과 노숙자의 차별이 이 세상에서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변화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내세의 삶을 무료(無聊)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을, 또는 자식이 잘난 것을 자랑도 하고, 경쟁에서 이기고, 돈 버는 재미가 삶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더 좋고 높고 나은 삶을 살려는 욕망이 삶의 에너지가 되고 문명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마르쿠제는 “문명과 에로스”에서 설파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움직이는 에너지이고 이치입니다.
하지만 내세, 즉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이 세상의 삶과 생명 형식으로 저 세상의 생명까지 재단하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구약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는데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그가 어떤 실존에 처하든지 살아있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삶의 내용이 없으면 죽은 것이었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죽음도 삶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생명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아 믿고 살아야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지 않고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믿음과 의식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좀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자연을 무리하게 파손하지 않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고, 가난한 나라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 시각으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 눅 2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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