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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왕 노릇 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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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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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황을 죄와 죽음으로 규정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 주장은 구약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창세기에 죄와 사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악과 이야기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죄를 교만이라고 했고, 아퀴나스는 자기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설명도 결국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인간의 죄를 다른 각도에서 본 설명입니다. 죄가 어떤 개념이든지간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죄가 인간과 하나님과의 본래의 관계를 깨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분리는 곧 생명과의 분리입니다. 생명과의 분리는 죽음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에서 인간 존재의 실존적 상황을 죄와 죽음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라고 했을 때 “한 사람”은 물론 아담입니다. 인류는 아담 때문에 죄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은 결국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인간 실존의 상황이 된 이야기는 우리를 매우 기분 나쁘게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담인데 그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물론 여기서 아담은 단지 한 사람의 자연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삼으신 사실에 대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표성의 원리 때문이 아니라 ‘나’라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전제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 때문에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 억울하게 생각되지만,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도 오늘날까지 그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모든 인류가 낙원에서 살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담은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7계명을 범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인터넷과 언론에서 얼마나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박사학위 논문이 문제가 되어서 역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 돈을 유용한 죄로 인하여 감옥에 가 있습니다. 7계명을 범한 목회자나 박사 학위 표절문제로 비난 받는 목회자나 공금을 유용한 목회자도 자기를 비난하는 이들과 언론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별 문제도 아닌 것을 마치 여론재판 하듯 몰아가는 언론이 야속하고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그들은 이 번 일만 없었던 일로 넘어가 준다면 앞으로는 정말 잘 할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뿐이 아닙니다. 사실 누구나 자기의 실수와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죄의 지배를 받는 생각입니다. 죄를 짓다가 들킨 이들은 몇 안 되지만 들키지 않은 이들은 많을 것입니다. 죄를 짓다가 들켜서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는 이들은 회개하여 생명이 지배하는 삶을 살게 될 기회를 얻게 되지만 지은 죄를 들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미안함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더구나 회개에는 이를 수 없으며 더욱 치명적인 것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모르고 이기적인 사람도 자기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크게 발전했고, 정치 경제 교육에 괄목할만한 업적들도 이룩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죄만 보지만 마음속에 숨은 죄의 성향은 더 심각합니다. 이 모두가 죄의 왕 노릇 하는 증거들입니다. 나는 인간의 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이나 불완전한 것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범죄 후에 어머니가 죄 중에 자기를 잉태했고 자기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통해,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설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해제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왕 노릇은 인간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다스릴 수 없는 엄청난 힘입니다. 인간은 정치 경제 과학 의학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 등의 분야에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도 인간을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어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죄는 왕 노릇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까지도 이런 문제로 고민하였습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만행이나 일본군 731부대의 인간생체실험의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 죽어야하지만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왕 노릇 하게 된 상황을 인간이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실증적인 죄만을 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실증적 죄만 줄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크게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부도덕과 사회악을 고쳐도 사람이 죽지 않게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율법이 없었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서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에게까지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고 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율법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늙어서 죽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본래 창조된 데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는 이 왜곡을 바로 잡으려고 애쓴 결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와 죽음이라는 문제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죄와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신 해결책을 은사, 은혜, 선물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죄가 왕 노릇 하는 인간 실존적 상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왕 노릇 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죄가 왕 노릇 하는 증거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으로 확증할 수 있지만 생명이 왕 노릇 하는 것은 실증적 증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인위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사람들은 열광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율법주의에 매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는 열광주의와 율법주의 모두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광주의자들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살고, 율법주의자들은 지켜야 할 규범들과 해야 할 일들에 얽매여 삽니다. 하지만 열광주의도 율법주의도 생명이 지배하는 생명의 왕국에서의 삶이 아닙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실증적인 차원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뿐입니다. 이런 칭의에 근거해서 생명이 지배하는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실증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실증적으로 생명의 왕국에 들어간 사람도 없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법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생명이 지배하는 삶은 우리가 생명이 지배하는 생명 나라에 들어갔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가되고 덧입혀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이 완전히 생명이 지배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동시에 죽음의 위협도 받습니다. 생명의 지배를 온전하게 받는 것은 마지막 주님 재림 때에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왕국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순종하는 것이 생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생명이 왕 노릇 하는 삶은 어떤 신앙적인 규범으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 자체도 생명의 왕국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 생명이 왕 노롯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의 통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그 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들어가 존재와 삶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생명 왕국의 비밀입니다.

지금 세상은 여전히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돈이 왕처럼 군림합니다. 성공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 추구에 천착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다루고, 자연과 사람까지를 물건 다루듯 합니다. 인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쳐야 할 학교가 비인간적인 일과 방법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속적인 성공을 세일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 지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합니다. 반생명적 세력과 사이비 생명의 지배를 분별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생명이 지배하는 역사가 온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 땅이 꽁꽁 얼어붙어 죽음이 지배하는 것 같았고 생명의 지배의 실증적 증거를 찾아볼 수 없었던 혹한의 환경에서도 생명이 지배하는 역사가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들을 봄의 계절에 확인하게 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지배하는 생명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죄가 왕 노릇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속은 생명이 왕 노릇 하는 생명 왕국의 시민권 자들이기에 죄가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실증적으로 생명의 지배를 경험하지 못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왕국에서 생명의 지배를 받는 것은 그 왕국의 합법적 신분 때문입니다. 생명이 지배하는 삶은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것으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도 아픔을 통해서도 시련과 실패를 통해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 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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