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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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3-03-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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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이라는 부제가 붙은 『두려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현대문명은 끊임없이 인간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두려움과 불안은 점점 증폭하고 있습니다. 911 사건 이후에 미국인들을 비롯하여 세계 모든 사람들의 불안은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불안의 요인을 예방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이 집행되어도 불안과 두려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테러에 대한 불안, 경제 위기에 대한 불안, 난치병에 대한 불안, 총기사고에 대한 불안, 환경오염과 자연재해에 대한 불안, 도덕적 가치의 붕괴로 인한 불안, 영적 무질서에 대한 불안 등으로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병이라면 과학적 치료가 필요할 것입니다.
『두려움』의 저자인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스리니바산 S. 필레이(Srinivasan S. Pillay)는 공황장애연구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학계에서 주목받는 학자입니다. 그는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과잉보호하는 뇌의 특이한 방식을 통해 뇌 속 무의식적 두려움의 메커니즘이 일, 사랑, 아이, 우정, 건강 등에 미치는 영향을 세밀하게 연구하여 뇌의 나쁜 습관을 바꾸기 위한 7가지‘맵 체인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질병으로서의 두려움을 치료하는데 나름대로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의 요인이 단순한 뇌의 나쁜 습관 때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때문이라면 그 치료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인간은 질서에서 안정을 찾고 무질서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물리적 환경의 무질서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신뢰가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에도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는“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두려움은 인간이 감당하기가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상태에 있는 유대민족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이 그들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자란 전능자라는 뜻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능하신 창조자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현실적으로 그런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상황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남쪽 유대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130년 정도 더 버티다가 결국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궁전과 성전은 모두 불탔고, 거기에 있었던 귀한 집기들은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가족을 잃었고, 불구가 되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실제로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조국의 상황도 분단의 역사가 70여년이 가까워 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분단이라는 것이 실제로 특별한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에 남아 있는 이산가족도 없고 실제로 공산당의 박해를 당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단이 씻을 수 없는 고통이 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부모님이 북한에 생존해 계시고 자식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나 남편을 북한에 남겨 두고 월남하여 결혼도 안 하고 지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꿈에도 그리는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70여년이 가까워 오도록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는 분단과 이산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신앙은 무슨 대답을 주는 것일까요? 70여년의 기도에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이 도대체 우리의 삶에 대해 관심이나 갖고 계시는 것일까요?
구약의 유대 백성들은 그와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으신 것인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나라와 대항하고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순응하고 적응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는 사람에 따라 달랐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무력으로 투쟁하다가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바벨론 제국의 새로운 질서에 재빠르게 적응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노력해서 관리가 된 이들도 있었고, 돈벌이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 처참한 상황 앞에서 체념하며 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체념이 두려움을 줄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자신들이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불신앙이라고 쉽게 단정하면 안 됩니다. 신앙이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가 너무 오래 된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좀 가까운 역사인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수용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치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영화도 있고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도 있고 그 수용소 현장에 가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생생한 증거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어서 그들의 정황을 바벨론 포로 때 보다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발가벗긴 채로 가스실로 또는 생체실험실로 또는 총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시편 23편을 비롯하여 성경구절을 암송하였습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기도 하고 자기들과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며 애원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갔습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면서 죽어갔고 시편을 노래하면서 죽어갔고 처절하게 회개하며 절규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늘을 향해 욕을 하며 하나님을 저주하며 죽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보여 달라고 애원했지만 끝내 하나님은 침묵하였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공포와 수치와 굶주림과 목마름과 고통의 극단적 상황을 우리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친구와 가족이 눈앞에서 발가벗긴 채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다음은 내 차례가 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뇌의 나쁜 습관 때문이 아니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오직 두려움과 공포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얼마나 부담 없이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너무 이기적이고 사치스러운 것들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은 공의가 훼손되기 때문도 아니고 대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특히 남을 위해서도 아니고 교회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은 더구나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나의 이름과 그동안 쌓아온 credit에 damage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안정과 평화를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런 것들을 앗아갈 대상과 상황을 두려워합니다. 그 대상이 나라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여론일 수도 있고, 안정된 목회일 수도 있고, 노후가 보장된 은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실직이 가장 큰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안정된 상식을 선택합니다.
그런 것들에 휘둘리면서 진리 편에 서지 못하고 휘청거립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와 가정과 교회와 질서와 안녕과 행복을 파괴해 버릴 것 같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정의도 윤리도 경건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 나를 두려워하게 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며 든든히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른 창조신앙은 나를 거짓 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생명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것들인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
『두려움』의 저자인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스리니바산 S. 필레이(Srinivasan S. Pillay)는 공황장애연구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학계에서 주목받는 학자입니다. 그는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과잉보호하는 뇌의 특이한 방식을 통해 뇌 속 무의식적 두려움의 메커니즘이 일, 사랑, 아이, 우정, 건강 등에 미치는 영향을 세밀하게 연구하여 뇌의 나쁜 습관을 바꾸기 위한 7가지‘맵 체인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질병으로서의 두려움을 치료하는데 나름대로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의 요인이 단순한 뇌의 나쁜 습관 때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때문이라면 그 치료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인간은 질서에서 안정을 찾고 무질서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물리적 환경의 무질서에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신뢰가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에도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는“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두려움은 인간이 감당하기가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상태에 있는 유대민족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이 그들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자란 전능자라는 뜻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능하신 창조자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현실적으로 그런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상황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남쪽 유대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130년 정도 더 버티다가 결국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궁전과 성전은 모두 불탔고, 거기에 있었던 귀한 집기들은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가족을 잃었고, 불구가 되었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실제로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조국의 상황도 분단의 역사가 70여년이 가까워 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분단이라는 것이 실제로 특별한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북한에 남아 있는 이산가족도 없고 실제로 공산당의 박해를 당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단이 씻을 수 없는 고통이 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부모님이 북한에 생존해 계시고 자식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나 남편을 북한에 남겨 두고 월남하여 결혼도 안 하고 지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꿈에도 그리는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복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70여년이 가까워 오도록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는 분단과 이산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신앙은 무슨 대답을 주는 것일까요? 70여년의 기도에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이 도대체 우리의 삶에 대해 관심이나 갖고 계시는 것일까요?
구약의 유대 백성들은 그와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으신 것인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나라와 대항하고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순응하고 적응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는 사람에 따라 달랐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무력으로 투쟁하다가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바벨론 제국의 새로운 질서에 재빠르게 적응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노력해서 관리가 된 이들도 있었고, 돈벌이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 처참한 상황 앞에서 체념하며 지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체념이 두려움을 줄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자신들이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불신앙이라고 쉽게 단정하면 안 됩니다. 신앙이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가 너무 오래 된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좀 가까운 역사인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수용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치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영화도 있고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도 있고 그 수용소 현장에 가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생생한 증거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어서 그들의 정황을 바벨론 포로 때 보다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발가벗긴 채로 가스실로 또는 생체실험실로 또는 총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시편 23편을 비롯하여 성경구절을 암송하였습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기도 하고 자기들과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며 애원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갔습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면서 죽어갔고 시편을 노래하면서 죽어갔고 처절하게 회개하며 절규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늘을 향해 욕을 하며 하나님을 저주하며 죽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보여 달라고 애원했지만 끝내 하나님은 침묵하였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공포와 수치와 굶주림과 목마름과 고통의 극단적 상황을 우리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친구와 가족이 눈앞에서 발가벗긴 채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다음은 내 차례가 되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뇌의 나쁜 습관 때문이 아니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은 오직 두려움과 공포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얼마나 부담 없이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너무 이기적이고 사치스러운 것들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은 공의가 훼손되기 때문도 아니고 대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특히 남을 위해서도 아니고 교회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은 더구나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나의 이름과 그동안 쌓아온 credit에 damage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안정과 평화를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런 것들을 앗아갈 대상과 상황을 두려워합니다. 그 대상이 나라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여론일 수도 있고, 안정된 목회일 수도 있고, 노후가 보장된 은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실직이 가장 큰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안정된 상식을 선택합니다.
그런 것들에 휘둘리면서 진리 편에 서지 못하고 휘청거립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와 가정과 교회와 질서와 안녕과 행복을 파괴해 버릴 것 같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그런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정의도 윤리도 경건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 나를 두려워하게 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며 든든히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른 창조신앙은 나를 거짓 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생명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것들인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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