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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명분과 사소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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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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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명분(大義名分)이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본분과 어떤 일을 꾀하는 데 내세우는 마땅한 구실이나 이유를 뜻합니다. 한국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대의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일을 했을 때, 누군가에게 그 이유와 목적을 변명할 수 있는 꺼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왜?’라고 물을 때 대답할 말이 궁색하게 되는데 옛날 선비들은 그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고 대의명분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업신여겼습니다. 대의명분이 진리는 아니지만 공익을 옹호하고 정의를 세우는 등 보편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어떤 대의명분은 반드시 공익을 옹호하고 정의를 세우며 보편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떤 이들의 대의명분이 집단이기주의를 대변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이치에 맞고 합리적이기 보다 감정적인 성향을 띠며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을 하게하며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선동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의명분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고 상대적 가치입니다. 상대적 가치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입니다. 어떤 집단이든지 구성원들이 처한 상황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논리가 서고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으며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한다면 그것이 곧 대의명분이 되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여야가 끊임없이 정쟁을 하게 되는 이유도, 교인들이 두 파로 갈라져 싸우는 이유도 양편 모두 나름대로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안에서 대의명분이 절대적 진리인 경우 그 대의명분을 훼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나 요한 같은 사도는 복음이 훼손되는 경우에는 사도의 권위와 모든 노력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그러나 대의명분에 반하더라도 복음을 훼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관대하였습니다. 할례나 결례를 행하는 것이 복음의 대의명분에는 합당하지 않지만 복음을 훼손하지 않고 단순히 덕에 관한 문제라고 판단되는 경우에 허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분별없이 복음과 대의명분까지를 가볍게 여기는 경우와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로 명분에 얽매이는 경우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대의명분과 아울러 사소한 일에서까지 너그러움을 보이나 진리를 훼손하는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는 복음과 명분에 대하여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로 인하여 사소한 일에서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복음을 훼손시키는 너그러움이나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직된 태도 모두 결국은 사소한 일에서 각각의 열매를 나타냅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것이 죄냐 아니냐 하는 차원에 머물면 안 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덕을 세우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참 신자는 얼마나 십일조를 잘 내고,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느냐 하는 문제로만 평가받으려 하면 안 됩니다. 그보다 훨씬 사소한 일에서 신자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실패하는 가장 흔한 경우는 사소한 일이라고 사소하게 생각하고 대처하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거의가 사소한 문제에서 실패합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에서도 거의가 사소한 일에서 실패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소한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사소한 일이 큰 일 입니다. 사소한 일이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인사하는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눈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는가,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을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절제하는가... 등의 일은 사소한 일이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의 인격이란 이런 사소한 일에 묻어 나타납니다. 인사와 말과 눈빛과 밥 한 그릇 대접하는 일을 통해 그 사람의 예의와 염치와 가치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하는 말투에서 사람됨이 나타나고, 남편에게 하는 태도에서 신앙의 수준이 드러나고, 후배를 배려하는 태도에서 인격의 그릇의 크기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느냐 용납하지 않으시느냐 하는 것은 교회 나오는 모습과 교회에서 하는 행동 이전에 사소한 일상에서 이미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중요한 명분을 핑계로 사소한 일에서 실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수인 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에 실수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목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이 목사의 일만큼 거룩하고 중요하고, 모든 날이 주일과 같이 중요한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일에서 실수하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웃 사람이 내가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의외라는 듯이“교회 다니시는가보죠?”라고 한다면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혀 교회 다닌다는 티를 내지 않았는데 이웃집 아주머니가“혹시 교회 다니세요?”“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그런 것 같아서요.”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래도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이 내가 다른 사람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 가족에게 가장 신자답지 못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다른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내가 좀 덜 똑똑하고, 덜 별나면 다른 사람이 편한데 그걸 못하고 늘 실패합니다.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제일 말을 잘하고 그 다음이 공산당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너무 잘나서 탈이고 똑똑해서 탈이지 좀 모자란 듯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잘나고 멋지고 근사하고 예쁘고 똑똑하고 능력 있게 보이려고 over하고 기를 세우다가 싸우고 충돌합니다. 신자의 특징은 예수님을 본받아“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여야 합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라고 생각하는 동안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의 대의명분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주 예수를 위해서라면 핍박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뉴욕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영적 대 각성 통곡기도... 이런 대의명분의 나무는 그냥 자라지 않습니다. 신자의 대의명분이라는 나무 밑에 자존심을 묻고, 잘남을 묻고, 똑똑함을 묻고, 예쁜 것도 묻고, 능력도 묻고, 명예도 묻고, 이기심도 묻고, 학벌과 가문과 경력과 경험과 업적... 또 뭐가 있을까요? 좌우지간 내가 생각할 때 나에게 아까운 것이 거름에 가장 좋습니다. 그것들을 신자의 대의명분이라는 나무 밑에 묻어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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