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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기쁨과 절망의 공존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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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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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 슬프고 외롭고 허무한 것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인생을 살아오면서 기쁘고 즐거운 경험보다 슬프고 외롭고 힘들고 허무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나이 들면 허무한 감정에 쉽게 지배 받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양입니다. 김광석이 불렀던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라는 노래 가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그 노래의 전체 가사를 보면 이 부부는 그래도 비교적 행복하게 산 경우인데 노래 전체가 매우 슬프고 어둡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황혼은 이런 느낌인 모양입니다. 반면에 인생의 황혼을 저돌적으로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곧 잘합니다. 인터넷 동영상에 “너 늙어봤냐?”라는, 젊은이들의 인생에 대한 부족한 이해에 대해 노인의 도전적인 나무람 같은 재미있는 노래가 올라와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는 아주 노골적으로 늙음을 거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나이 구십 살에 돋보기도 안 쓰고 보청기도 안 낀다./ 틀니도 하나 없이 생고기를 씹는다./ 누가 내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해서 늙은이 노릇하게 하는가./ 세상은 삼십 년간 나를 속였다./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나이 들어 늙어서도 이런 용기를 가지고 새 출발하는 듯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관하고 모든 것에 대해 불평하고 절망과 좌절가운데서 사는 것보다는 백번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인 자살률이 점점 증가하는 상황에서 반갑기까지 한 노래입니다.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두움,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이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대조되는 개념들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만 심층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개념들이 절대적인 것들이 아니고 서로 반대되는 개념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영균씨가 쓴 “솔로몬의 가을”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시인들은 일반인들보다 삶을 심층적으로 봅니다. 시인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도 느끼고 경험하지만 그 경험과 느낌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이 시인의 눈에는 가을이 풍요의 계절임과 동시에 슬픔과 빈곤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은 인생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가수 패티김이 불렀던 “빛과 그리고 그림자”라는 노래에는 이러한 인생의 명암이 더 극단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행복/ 사랑은 나의 불행/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사랑은 나의 천국/ 사랑은 나의 지옥/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가을이 지나갑니다. 온갖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가을입니다. 이제 곧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찬 서리가 내리면 지천이든 먹을 거리도 희소해지고 아무데나 누워 팔베개만 하면 하루를 안식할 수 있던 집 없는 이들의 기회와 조건들이 사라져서 외로움과 슬픔과 고통의 계절로 변할 것입니다. 그래도 시인은 극단적 결핍이 일상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보게 하는 렌즈임을 노래합니다. 시인 홍해리의 ‘가을 들녘에 서서’라는 시입니다.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시인들의 시와 노랫말에 나타난 인생의 희로애락은 모든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믿음으로 대처하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요? 믿음으로 대해도 이율배반적이고 빛과 그림자이며, 풍요와 빈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현실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시인들은 인생의 어두운 면에 지나치게 빠져 있고, 어떤 시인들은 인생의 밝은 면을 극대화하려고 애를 쓰고, 또 다른 이들은 빛과 그림자가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만 합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이율배반적으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도 인간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한 믿음의 대응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직시하는 인간의 지혜는 아무리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하려 해도 늙음과 죽음 앞에 허무에 압도되고 맙니다. 하지만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믿음의 대응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새 생명의 환희가 허무와 죽음까지를 압도합니다.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대 지역은 바벨론에서 파견된 총독들에 의해서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자유와 기본 인권도 유린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더욱 큰 고통은 영적인 실망과 혼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지, 그도 아니라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까지 한 것은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런 절망의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일이 년이 아니라 수십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고난의 초기에는 나름대로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은 계속 희망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말씀도 아무 의미 없이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이사야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난의 세월이 길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현실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앙적 적응이 아니라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식의 적응입니다. 포로의 삶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보수적입니다. 혁명이니 개혁이니 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피하려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소수민족으로 산다는 어려움과 한계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보람과 재미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출세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수십 년 계속되자 그러한 삶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거기서 해방이라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에 처음에는 열정과 희망을 가졌었지만, 살아보니 안 믿는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게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갖고 살기보다 자본주의 질서와 가치에 순응하며 삽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나 구원에 대한 관심과 열망 같은 것은 점점 사라지고 남은 것은 종교행위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가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구원에 대한 열망이고, 둘째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은 바벨론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처럼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자기들의 힘이나 지혜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역사적으로 인간에 의해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도 정치, 경제, 역사 같은 것을 다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과 힘은 사람들의 힘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이루신다는 말은 그것의 성취가 사람의 기대와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은 개인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과 나아가서는 세계의 역사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 55:8-9절에서 전하였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 이런 저런 수고와 노력을 해도 헛수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직면하려 하지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더 교묘한 대응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과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내 뜻을 들어주셨다고 고백도 하고 간증도 합니다. 그런 고백과 간증이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의 올바른 체험과 간증은 하나님께서 내 생각과 뜻을 들어주시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뜻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는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바울은 죄인의 괴수임을 깨달았으며, 욥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은 인생의 허무와 죽음까지도 너무 하찮은 것으로 압도합니다. 그 새 생명의 환희를 뭐라 표현할 수 없어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거나 사고나 재난으로 가족과 재산을 잃은 이들은 구원의 메시지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비교적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구원의 환희를 만끽하기가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악하고 우리는 너무 약합니다. 기대하는 행복은 요원하고 불행은 꼬리를 물고 이어 집니다. 구원이 필요하기는 해도 그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돈, 건강, 사람들에게 받는 인정입니다. 구원에 대한 열망이 없거나 그 구원을 내가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절망과 좌절에 봉착하여 상대적인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상대적인 것들로 인한 기쁨 정도로는 산들과 언덕들이 손뼉치고 노래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성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의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모든 좋은 것들은 죽음으로 귀결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죽을 몸이 부활의 새 생명으로 바꿔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사건은 있을 법한 일이 아니고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천지가 개벽이 되어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 구원이 성취되었을 때 산들과 언덕들이 춤추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토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구원의 환희 가운데 공존하는 슬픔과 절망을 헤쳐 나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쉼 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에 대해 열망과 믿음 가운데 납득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진지하게 질문 드려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질문한 사람에게만 질문의 깊이와 수준에 맞도록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사 55:12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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