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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인생의 목마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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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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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터넷을 산책하다가 만난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누가 지은 시인지 모르겠는데, 시의 제목은 <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 입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는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한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와 그리고 당신도./ 어떻게 해야 행복 해지는지 아는 나는/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난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난 몇 주간은 무척 바쁘고 힘들게 보냈습니다. 일이 힘들 때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힘들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을 힘들게 해야만 할 때 속상하고 불평도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힘든 일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또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당하고 감당치 못할 시험은 피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피하게 하신 시험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교통사고도 피하게 하셨을 것이고, 큰 병에 걸리는 것도 피하게 하셨을 것이고, 별의별 어려움을 다 피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위의 시에서처럼 걷지 못하고, 서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될 시험도 피하게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분들의 소원을 다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생의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은 인생의 갈증을 누구보다 심각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지역감정이 있게 마련인데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지역감정은 유별났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유대인들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유대인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켜내지 못한 이유로 인해 정통 유대인들에게 심한 차별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가 교통의 요충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피하여 다녔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지역을 방문하여 수가라는 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를 만나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여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보기에 목마른 나그네 신분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자 여인은 그 물을 자기에게 주어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물 길러 다니는 일이 그녀에게는 성가신 일이었습니다. 그런 문제라도 해결이 된다면 다행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물물을 다시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될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한 번 마시고 말 물이라면 기적으로 가능하겠지만 평생을 마셔야 할 물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공급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물 길러 가는 일 말고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유대인들로부터 차별 받는 사마리아인이었고, 사마리아인들에게 조차 왕따를 당하며 살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물 길러 가지 않아도 될 기적의 생수가 있다면 얻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갈증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인데, 그 생수는 다시는 우물에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는 생수입니다. 하지만 이 생수는 실제로 목마를 때 마시는 우물물이 아닙니다. 여기서 생수는 은유(隱喩-metaphor)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떡은 방앗간에서 만드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하지 않고 다시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는 기적의 생수를 구합니다. 결코 주리지 않을 떡을 구합니다. 그 생수는 물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 떡은 떡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떡을 주고 물을 주는 기독교가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떡과 물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건강, 돈, 인기와 존경 같은 것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나이 80이 되어도 100m를 10초에 주파할 수 있는 건강, 돈만 벌 수 있다면 유병언식 방법도 괜찮습니다. 인기와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과 학문과 명예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 물을 나에게 주어 다시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보장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렇게 되었을까요? 왜 우리가 다시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될 기적의 생수에 집착하게 되었고, 왜 다시는 주리지 않을 떡에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이해하는 생수는 생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생명의 떡은 생명의 떡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다시 땀 흘리지 않아도 될 우물물에 집착할까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기적의 떡을 먹은 제자들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막 8:17절).

나이 이천 살을 넘게 먹은 교회가 아직도 이 생수나 생명의 떡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다시 물 길러 가지 않아도 될 기적의 생수를 원했던 것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다섯 명의 남자와 헤어지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과도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니 그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녀는 요부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팔자 사납게도 여러 남자에게 버림을 받은 불쌍한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삶이 이웃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의 삶에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는 말에 왜 그렇게 혹했는지 알만합니다. 요즘 교인들이 왜 그렇게도 복과 은혜와 기적에 그렇게도 혹하는지 알만합니다. 돈의 궁핍에 너무도 힘들었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건강도 안 좋고, 친구도 없습니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권력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무시할만한 배짱도 없습니다. 삶에 시달리고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경제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이 사마리아 여자와 같습니다.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한방에 날려버릴 비결이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런데 그 비결을 교회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복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삼박자 구원입니다.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될 기적의 생수를 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기적, 축복, 형통, 건강, 출세가 간증의 중요 메뉴입니다. 설교의 핵심 메시지도 그렇습니다. 복과 은혜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 애처롭고 안타깝습니다. 한 편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안타깝고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메시야 아닌 것들에 목말라 하다가 메시야를 만나는 경험으로 인생의 온갖 목마름을 해갈하였습니다. 그 경험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다시 겪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그런 것들을 단번에 날려버릴 기적 같은 것을 바라지 않고 주님의 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다윗이나 하박국도 우리와 같이 일상의 염려를 걸머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외로움과 슬픔과 좌절을 경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님을 경험하고도 역시 돈 때문에 힘들고, 아내나 남편 때문에 힘들고, 부모나 형제 때문에 힘들고, 자녀들 때문에 힘들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한 방에 날려 버릴 기적은 없습니다. 그 기적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성취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수이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새 생명의 힘에 지배 받으며 살도록 노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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