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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명분 뒤에 감춰진 이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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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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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설거지 좀 해 달라고 하니까 남편이 말하기를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있지만 설거지는 못하겠다.”고 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위선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려내고 약대는 통으로 삼키는 자에 대하여, 남의 눈에 티를 지적하면서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지도자들 가운데 그런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구약의 요나는 그런 면에서 우리의 거울이 되는 인물입니다. 요나는 앞 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아이만 12만 명이나 되는 니느웨 주민 보다 박 넝쿨 하나를 더 아까워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나는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요나의 죄를 드러내셨으니까 우리는 요나가 나쁜 사람인 것을 아는 것이지 그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요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요나가 활동한 시대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에 국한 되는 듯하였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의 계시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구속의 경륜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이스라엘 국가와 민족을 넘어 이방 민족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는 이방 나라인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이방인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계시하는 것이 요나서의 신학적 의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속의 사역을 선지자 요나의 표적에 비유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방민족의 구원을 위해 전권이 할애된 성경은 요나서뿐입니다. 그만큼 요나서는 이방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심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의 관심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야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관심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관심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불신자의 태도보다 더 나쁩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수도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 척하면서 자기 관심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나는 신자든 불신자든 인간 본성의 진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게 됩니다.

요나는 민족주의자입니다. 조선의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에 대항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족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런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지자는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민족주의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자기와 다름 때문에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하나님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여 순종을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회개를 외쳤지만 하나님의 바라시는 대로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바로 여기가 우리의 실존적 상황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없고 의로운 것이 없고, 선을 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이 딜레마가 우리의 출발선입니다. 나에게 선이나 의가 없고 선이나 의를 행할 의지도 없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는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울은 그것을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합니다(고전 15:10).

초등학교 시절 글씨 쓰기를 배울 때 선생님이 연필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잡고 글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연필을 잡고 가만있기만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손을 선생님께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선행이나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도보다 수고한 바울이나 다른 사람에 비해 형편없는 나 자신이나 은혜로 되었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바울, 어거스틴, 칼빈, 박윤선이라는 이름 뒤에 황상하 라는 이름을 나란히 놓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은혜입니다. 요나라는 인물을 통해 이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들기까지 한 것 때문에 우리는 그가 하나님에 대해 무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대단한 수준의 신학자입니다. 나는 요나서를 읽다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에 놀랐습니다. 그가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불순종합니다. 그가 불순종 한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신학적인 이해가 이만큼 탁월한 신학자도 많지 않습니다. 그는 신학적으로도 탁월했고 민족의식도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탁월한 신학이나 민족주의가 그의 믿음에 기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몰라서 불순종 한 것이 아니고 알면서도 불순종 하였습니다. 아니, 알았기 때문에 불순종하였습니다. 너무나 기가 찬 노릇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그를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는 것이 병(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나의 경우라면 식자우환이 아니라 식자재앙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불순종했다고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싫어서가 아니고 그 사랑이 원수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향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사랑의 하나님, 다른 사람에게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기를 바라는 심사입니다.

박 넝쿨 사건에서 요나의 극단적 이율배반이 드러납니다. 그는 어린아이만 12만 명인 니느웨 사람들의 목숨을 박 넝쿨 하나보다 경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요나를 타이르시고 설득하셨습니다. 박 넝쿨은 아까워하면서 니느웨 사람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일깨워 주려 하셨지만 요나는 자기가 죽어도 정당하다며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설득과 요나의 발칙한 반항으로 요나서는 끝이 납니다. 위대한 민족주의자, 탁월한 신학자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거는지를 성경은 고발합니다. 위대한 민족주의자나 탁월한 신학자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주의도 신학도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회개도 예배도 찬양도 선교도 헌신도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것들이 재앙이 되는 것은 이기심 때문입니다. 요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 뒤에 이기심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자기의 대의명분을 해치면 안 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요나는 그 일을 위해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기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를 지적하셨습니다. 나라, 민족, 자유, 정의, 평등, 윤리, 법, 질서 같은 것은 말 뿐입니다. 수 십 만 명의 목숨을 박 넝쿨 하나보다 하찮게 취급하는 것이 요나의 수준입니다. 이 요나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수준입니다. 사람들의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실제는 대의명분이 아니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박 넝쿨 하나에 집착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이익과 상관없는 수 십 만 명의 생명이 살게 된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이익이 되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 사라지는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 대해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세월호 선장이나 유병언씨는 화성이나 금성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김연아, 최경주, 신지애, 류현진, 추신수가 대한민국이 낳은 인물이듯이 세월호 선장이나 유병언도 대한민국이 낳은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세월호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고 그런 사건의 제발을 방지하되 그 사건을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데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나 언론인들이 세월호 사건을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꺼리로만 삼습니다. 유병언은 안 잡히고 그 자녀들은 꼭꼭 숨어서 들키지 않는 것이 화가 나면서도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지만 은근히 부러운 생각이 들다가 정신이 아찔해지기도 합니다. 유병언과 세월호 선장이 우리의 자화상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이고 수준입니다. 국회의원들이나 목사나 신부나 스님들 중에 그보다 나은 사람 얼마나 될까요? 대학교수들이나 신학교 교수들 중에 그들보다 나은 사람 얼마나 될까요? 법조인들 중에 그들보다 나은 사람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이런 지도급 인사들 중에 세월호 선장이나 유병언씨보다 더 나쁜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우리 중에 요나 보나 나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요나처럼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바락바락 우기며 대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참으시면서 우리를 타이르시고 설득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소한 이익이 사라지는 것을 인해 불평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너무도 위대하고 엄청난 일을 인하여 화를 내는 자들입니다. 당신에게 화나는 일이란 어떤 일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내가 주장하고 내세우는 대의명분이란 어떤 것입니까? 자존심 때문에 목숨 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타이름과 설득을 듣고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우리를 설득하시고 타이르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내 주장과 고집과 생각과 대의명분과 자존심에 목숨 걸지 않고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의 희망이 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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