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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곤혹스러운 질문,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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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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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아무리 위대한 선생도 자기가 가르친 것을 다 실천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나 종교지도자도 자기가 가르치는 것을 다 실천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신 것을 온전하게 다 실천하셨습니다. 성경에 의인이라고 불렸던 위대한 사람은 모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은 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의로워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으로 의인이 되는 데도 의인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인간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면 공부를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가야 할 텐 데 반대로 많이 배우고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배운 사람이나 경험이 많은 사람이나 또한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자꾸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듭니다. 어떤 수준에서는 성경도 그런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도 일반은총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원리가 적용됩니다. 즉 일반은총으로서의 지혜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거침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흰 머리 앞에 일어서라고 하는 것은 일반은총의 가치 질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일반은총의 질서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 가치 질서가 무너지면 어떤 사회도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일반은총의 질서도 존중해야 하지만 그 수준에 머물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 원리를 따르고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일반은총으로서의 지혜와 능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와 원리가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대한민국 경포대에서 미국 플로리다까지 헤엄쳐서 간다면 올림픽 금메달 수영선수나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가라앉는 맥주병 같은 사람이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경주와 같습니다.

목사가 하는 설교 사역이나 일용직 노동자의 막노동이나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동일합니다. 목사는 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곤혹스러워 합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곤혹스러웠지만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성령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설교할 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말씀을 듣는 자나 전하는 자가 동일합니다. 말씀에 대한 부담은 설교자나 청중이나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요 14:15)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동일한 질문을 세 번 받았습니다. 첫 질문에서 사랑한다고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번이나 더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을 받고 근심하였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이미 진정성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 날 사랑해?”라고 묻는 질문 자체에 사랑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나?”라고 되묻지만, 여자들은 꼭 말로 해야 된다고 합니다. “사랑한다.”라고 대답해도 “진짜가?”라는 확인 질문을 받습니다. 사랑은 정말 정의하기도 힘들고 실천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나의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으면 어려워집니다. 의외로 그런 사연들이 많습니다. 아내를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했고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하던 중이라도 한 번의 실수로 사랑을 부도 낼 수가 있습니다. 사랑에 부도가 나면 크레딧이 망가지기 때문에 여간 노력을 해도 상대는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 대화 가운데 “진짜?”, “정말?”이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 아니고 그를 믿는다고 하는 모든 이들에게 물으십니다. 참 곤혹스러운 질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근본 토대가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 것 같으면 쉽겠지만, 이미 전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안 믿어 주실 것 같아서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전과가 있지만 앞으로 잘 하면 되겠지 라고 다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베드로의 경험은 다른 모든 제자들의 경험이고 우리 모두의 경험입니다.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었는데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으니 죄질이 아주 나쁩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수준이고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대로 계속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경험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언제 어느 순간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할지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꽤 괜찮은 신앙인처럼 생각하며 지냅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봐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사시에는 나의 진면모가 드러납니다. 베드로처럼 말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기도 하고 말로는 아니지만 행동으로 주님을 부인하게도 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할 것 없이 불신자보다 더 악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그런 부류의 사람과 다른 것으로 구분하지만 내가 그런 분쟁에 휘말리지 않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베드로도 위기 상황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기가 꽤 괜찮은 신앙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 상황이 베드로의 본래의 수준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는 데까지도 가겠다고 큰 소리를 쳤는데 실제적 위기가 닥치자 슬그머니 안전거리를 유지하더니만 결국은 발을 빼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핵심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자기의 것을 잃지 않으려고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예 발을 빼 버립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으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질문을 안 받아도 될 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배울 때, 담당 교수가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 문제를 풀게 하였습니다. 보통 교수들은 출석부 앞에 있는 몇 사람의 이름만 불러 질문을 하거나 문제를 풀게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교수는 “제 클래스에는 안전지대가 없습니다.”라고 선언을 하고 출석부 끝에 있는 이름, 뒷자리에 앉은 학생, 기둥 뒤에 얼굴을 감추고 있는 학생까지 불러서 질문하고 문제를 풀게 합니다. 숙제를 못했거나 공부를 싫어하는 학생은 가능한 한 교수와 눈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교수와 대화하는 것도 피하고 클래스에서는 뒷자리에 앉습니다.

이게 우리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신자들이 신앙의 깊은 자리에 발 들여 놓기를 꺼려합니다. 예수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하면 질문도 받아야 하고 대답도 해야 되고 이런 저런 일을 시킬 테니까 아예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참여는 하되 구경꾼으로 남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편할지는 몰라도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고 그 관계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라고 반복해서 요구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다문화 다종교 상대주의가 지배적인 세상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토대입니다. 그래서 현대 지성인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신실한 종교인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예수님 없는 교회, 예수님 없는 기독교, 예수님 없는 복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곤혹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고 동시에 내 안에 영적 생명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요 2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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