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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누가 왜 ‘가만히 있으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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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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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세월호 참사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마디로 “안타깝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배가 침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배 안의 사람들을 구조할 수 없었던 상황이 참담하기만 합니다. 그렇게 참담한 참사를 지켜보면서 고난주간을 보내고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고난주간이 지나고 부활절 아침이 되었는데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위로는 부활밖에 없는데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진리보다 인지상정 때문인 것 같아 그 또한 목사에게는 부담입니다. 자식과 가족을 잃은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슬픔을 당한 모든 이들이 부활의 신앙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게 되기를 역시 기도할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 애굽 왕 바로가 군대를 이끌고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러 폭풍처럼 좇아왔습니다.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가 가로 놓여 있고 뒤에는 자기들을 잡으려는 군대가 질풍처럼 달려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탈출 전에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도망치다 잡히는 것보다 그냥 애굽에서 바로를 섬기며 사는 것이 났다고 하며 출애굽을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염려했던 일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호와께 부르짖고 어떤 이들은 모세에게 항의하며 원망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세로서도 별수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상황이 너무 다급하고 황당하고 두려워 백성들은 우왕좌왕하며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그 때 모세가 나서서 백성을 안심시키며 하는 말이 출애굽기 14:13-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로서도 황당하고 두려운 상황이었겠지만 그가 믿고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내시리라고 믿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낸 아이디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능력이고 지혜이고 방법입니다. 실제적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시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어떤 일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하여 실행하게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가만히 있게도 하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수백 명을 태운 세월호가 점점 기울어 침몰하고 있는데‘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구조 요청을 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는데, 잠수지원 장비를 갖춘 구난함이 다음날 새벽에 도착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습니다. 구명정 46개 가운데 2개만 작동했다는 것과 불과 얼마 전에 안전 점검에서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는 검사결과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선미에 전시실을 증축한 것도 사고를 부른 원인 중의 하나라는 지적이 있고, 직접적인 사고의 원인은 배를 급선회하여 컨테이너와 차량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배가 기울어 침몰하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약방문으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월호의 참사는 어떤 문제든 우선 책임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고질적인 관료주의가 몸에 밴 사람들이 협동(?)하여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백 여명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가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부담을 피하고 싶은 것이 바로 관료주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행여 잘못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 같은 책임을 저버리고 승객보다 먼저 구조선에 오른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누가 “가만히 있으라.”라는 방송을 내 보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승객들의 안전보다 책임질 일을 하지 않겠다는 데 무게 중심이 기운 조치였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1986년 4월26일 오전 1시23분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하여 엄청난 량의 죽음의 방사능이 대기로 치솟고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같은 날 새벽 5시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폭발은 없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상치보다 60만 배나 많은 방사능이 소리 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체르노빌 인근 도시 프리피야트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발생 30시간이 지나고 방사능이 아이들을 덮치고 나서야 아이들을 대피시켰지만 수많은 아이들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습니다. 이 참사에서도 책임자들은 사람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관료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나 세월호 선장과 일부 선원들과 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랄드 포드 전 미국대통령이 “국가의 자본 중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진실 중 하나는 관료는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관료주의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비효율성을 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비효율성이 곧 비인도성이고 비도덕성이고 비생명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료주의 사회에서 생존의 지혜(?)는 “나서지 말 것”, “공익보다 이기심을 따라 행동할 것”,“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면 벌이지 말 것”, “인간의 고통보다 윗사람의 진노를 두려워할 것”, “끝내 내 자리를 지킬 것.”등등입니다. 일이 다급하고 공익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이익이 소실(消失)될 위험이 클수록 복지부동하는 것이 관료주의입니다. 이것을 보신주의(補身主義)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런 태도는 진정한 보신주의가 아니고 공멸주의입니다. 일본이 정치와 경제에서 그렇게도 힘들어 하는 것도 관료주의 때문이고, 앞으로 미국이 풀어야 할 숙제도 관료주의입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구원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면 그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은혜를 가르치기 위해“가만히 있으라.”고 하실 법합니다. 사실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은혜로 되지만 인간은 가만있도록 창조되지는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르치고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복지부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는 것은 무모할 뿐이고, 우리가 확신하는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렸지만 인간은 또한 책임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믿음까지도 은혜라는 사실을 가장 강조한 사람이 바울이지만, 그는 인간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은 핑계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은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책임이 있다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존엄성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전할 텐데 우왕좌왕 하여 혼란과 위험을 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서나 모든 사람을 위해서 가만히 있어야 할지 무슨 일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장애자가 아니라면 그런 선택과 판단을 해야 합니다. 지도자라면 더더욱 그런 선택과 판단을 해야 합니다. 인간을 인격적 존재라고 할 때 그 “인격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책임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짐승에게는 책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책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만이 갖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월권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외 모든 일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할 때는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인간의 책임도 충분히 고려하고 무엇보다 인간 생명에 대한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바다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게 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사람들이 너무 무모하게 남용하는 경향이 있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조치로만 대처하고 자기들은 승객들보다 먼저 구조선에 올라타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면 어떤 조치를 취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행 27: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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