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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을 비웃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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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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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택쥐페리가 1943년에 세상에 내 놓은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데, 성경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만큼이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어린왕자>는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독자들은 저자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의 생애와 오버랩 되는 책 내용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생텍쥐페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측 정찰기를 몰고 지중해 상공을 날다가 실종되었습니다. 1940년부터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 머물던 생택쥐페리는 자신이 예전에 복무했던 비행정찰대 복귀를 늘 원했다고 합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어 늘 비행을 갈망했던 그는 소망대로 1944년 7월 31일 자신의 비행기와 함께 정찰임무를 수행하다가 격추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왕자>는 생택쥐페리가 미국에 머물던 1942년 여름부터 저술 작업을 시작해 1943년 4월 서점에 처음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 뉴저지 버빈 하우스에서 <어린왕자>를 쓰고 직접 삽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저자는 순결한 소년 어린왕자가 지상의 여러 성인을 반영하는 다른 별에서 겪은 체험을 통하여 인생에 대한 일종의 초월적 비판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순결한 소년의 시각과 분리되지 않고 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자의 심정과 윤리가 혼연히 융합되고 표백(表白)되어 있어, 프랑스는 물론 미국, 독일 등 각국에서도 비상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비행도중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여 겪은 경험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의 어린왕자는 자신의 행성을 떠나 여러 작은 행성들에서 앞뒤가 꽉 막힌 듯한 어른들을 만나게 됩니다. 따르는 이가 아무도 없음에도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며 권위적인 모습을 중요시하는 사람,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에도 허영심만 가득한 사람, 술을 마시면서 자신이 왜 술을 마시는지 이유마저 모르는 술꾼, 숫자에 민감하고 재산을 축적하는 데만 집착하여 그 재산을 더 불리는 데에만 급급한 상인, 점등인이라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는 있으나 융통성 없고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 지리학을 연구하지만 정작 자신은 탐험을 한 번도 해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증거만을 믿고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학자까지 어린왕자는 이런 어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어린왕자의 순수한 눈에 비친 이상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책 첫머리에 나오는 삽화 중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그림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언뜻 보기엔 중절모자이지만 사실은 자기보다 몸집이 몇 배나 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입니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어른들의 눈에는 모자일 뿐이고, 어린왕자에게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입니다. 어른들은 뱀이 코끼리를 삼킬 수 있다고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른들과 어린왕자 사이엔 인식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린왕자의 순진 담백한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이야 말로 모순투성입니다.

생각 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삶에 있어서 추구하는 것과 이상은 다르겠지만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멈추어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잠간씩 멈추어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렸다가 다시 달린다고 합니다. 너무 서둘러 달려서 자기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뒤쳐졌다고 생각하고 기다렸다가 영혼이 따라오면 그제야 다시 달린다는 것입니다. 성장지상주의에 집착하여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왕자가 왕이 있는 어느 별을 방문했습니다. 그 왕은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 왕은 모든 이들을 자기의 신하로 여깁니다. 자기는 왕이고, 상대방은 모두 신하입니다. 그 왕은 나름대로 훌륭한 왕입니다. 너그럽고 분별력이 있는 왕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너그럽게 포용하지만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은 왕이고 다른 모든 사람은 자기의 신하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질서를 흔드는 것은 누구이건 무엇이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지 않지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어린왕자의 눈에 이 왕은 이상합니다. 저자는 어린왕자의 순수한 눈을 빌어 그 왕을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독자는 어린왕자의 시선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조롱과 비웃음까지를 읽어내는 재미를 느낍니다.

성경에도 그 어린왕자가 보았다면 너무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한 사람의 왕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바로 헤롯입니다.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안티파스입니다. 헤롯 대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헤롯 아킬레오인데, 유다와 사마리아 땅을 다스렸고, 아버지와 비슷한 독재자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둘째는 헤롯 안티파스인데,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요단과 사해 동편 지역)의 분봉 왕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이고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 잠시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셋째는 헤롯 빌립 1세로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으로 이두매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조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는데, 형 안티파스가 로마로 가던 도중 이복동생 빌립의 집에 들렀다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륜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동생의 처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세례 요한이 안티파스의 그 불륜을 지적하다가 투옥되고 결국은 처형됩니다. 헤롯의 잔치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살로메는 빌립 1세와 헤로디아 사이에서 태어 난 딸입니다.

헤롯 왕가가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가 아무리 무서운 독재자라고 하여도 백성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것이 불륜이라고 지적한 선지자 세례요한을 죽였으니까 소문은 더욱 들끓었고 민심은 더욱 흉용 하였습니다. 게다가 이상한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안티파스가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안티파스로서는 머리끝이 주뼛 서게 하는 소문입니다. 아마 꿈자리도 어지러웠을 법 합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는 세례 요한이 예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티파스로서는 예수가 실제로 세례 요한이 환생한 인물이건 아니건 간에 부담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독재자에게 이런 인물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제거하는 것은 또 다른 부담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통치 영역 밖으로 추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가서 일종의 망명을 종용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헤롯의 뜻을 전달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헤롯을 빙자하여 예수님을 겁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한 지역이 안티파스의 통치 지역입니다. 안티파스로서는 예수가 자기 지역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습니다. 요즘도 통치자들이 정적이나 자기의 비위 사실을 폭로하는 사람을 국외로 추방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헤롯이 바리새인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망명을 종용했다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일단 헤롯의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 갈릴리 지역에 머물러서 여론을 뒤숭숭하게 만든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암시이며 겁박인 셈입니다. 헤롯 왕가의 악명으로 볼 때 예수님께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안티파스의 아버지 헤롯 대왕은 갓 태어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두 살 아래의 유아를 모두 살해한 인물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은 자신의 세 아들을 처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장례 때는 모든 사람이 슬퍼하도록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롯 대왕을 꼭 닮은 인물입니다. 헤롯 가문의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가족을 살해하고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무슨 일이든 할 광기 서린 독재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모든 이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던 헤롯 안티파스였지만,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여우는 영악한 동물입니다. 영악하지만 무시무시한 동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헤롯을 가볍게 보신 것입니다. 헤롯의 위협을 비웃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위협을 비웃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왕으로서의 기득권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자신의 속내는 물론 재산도 나이도 건강도 불안도 숨깁니다. 그런 것은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도 있고 또 무시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불안해합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누구에게나 왕처럼 행세하려고 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그런 자를 비웃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가진 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기에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재물의 위협이나 권력의 위협이나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어느 시인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하고, 듣는 이 아무도 없어도 노래하고, 무엇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눅 1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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