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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현상, 살아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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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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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을 거슬러 올라가면 생명의 기원이 무기물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과연 무기물로부터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나름대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리처드 도킨스입니다. 그의 “이기적 유전자”에 의하면 자외선이 넘치고 전기 방전이 잦던 원시지구에서 단순한 구조의 화합물이 서로 작용하여 복잡한 분자들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유기물이 들어있는 원시수프에서 어느 날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분자, 즉 자기 복제자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자기복제자는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DNA가 되었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DNA가 생물인가 혹은 무생물인가도 논쟁 중에 있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원자구조론, 통계역학, 상대성이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이론 물리학적 연구 업적을 남겼고, 전자의 파동 이론을 발전시켜 슈뢰딩거 방정식을 수립함으로써 파동 역학을 수립했으며, 1926년에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과의 형식적 동등성을 증명하여 양자 역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을 텄다는 업적으로 193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낸 공로로 1962년 의학생리학부문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모리스 윌킨스 등이 모두 생명의 비밀을 탐구해보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책이 바로 에르빈 슈뢰딩거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였다고 하니 생명현상에 대한 그의 관심이 특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0여 년 전에 나온 이 책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점이 많다는 지적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생명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과 함께 생물학, 물리학, 화학 등 과학의 통섭(通涉)에 관한 효시가 되었고, 생명의 문제를 철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하였으며, 분자생물학과 뇌과학 등 여러 학문을 태동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유전자의 질서를 생명현상의 질서로 보았고, 모든 생명현상이 양자물리학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분자생물학과 게놈의 분석이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생명의 현상은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생명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설명을 이해하는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생명 자체를 이해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학이 생명현상을 어느 정도까지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애당초 인간의 생명은 과학적 분석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영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생명현상도 사회적 영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해야 합니다.

생물학에서는 생명현상을 생화학적으로 설명하여, 생명이란 성장, 물질대사, 대내외적 움직임, 자신과 닮은 개체 생산의 생식기능,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것 등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어떤 정의나 설명도 충분하고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노새는 살아 있지만 생식기능은 없다고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바이러스는 성장하지 않고 숙주세포 바깥에서는 생식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현상을 상식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숨 쉬고 심장이 작동하고 먹고 배설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현상은 우리가 활동하는 모든 것입니다. 출근하고 학교에 가고 잠자고 운동하고 여행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생명현상입니다. 희로애락도 생명현상입니다. 이것이 생명현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설명입니다. 이런 것이 멈춘 상태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있다 또는 죽었다는 것을 너무도 단순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의학에서는 뇌사자로 분류된 사람도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지만 뇌의 활동이 멈춘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을 죽은 것으로 보느냐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느냐가 아직까지 논쟁 중입니다. 어떤 이들은 뇌사를 죽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주 드물게 뇌사 상태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람도 있으니까 뇌사를 죽은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뇌는 살아 있으나 심장 박동이 멈춘 사람을 기계 장치로 심장을 뛰게 하여 연명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찬반양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나 생리적인 차원에서도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살았다 혹은 죽었다는 것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이야기 합니다. 겉모양은 멀쩡하지만 정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죽었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언제나 남을 속여먹으려고만 하는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도 죽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하고 공공시설이나 사람을 파괴하려고만 하는 사람도 윤리 도덕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져서 극단적으로 자학을 하거나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심한 경우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익을 해치고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도 윤리 도덕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자식들을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살았다 또는 죽었다는 것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살았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젊어서 죽는 사람, 늙어서 죽는 사람, 어릴 때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1546년에 죽은 루터나 그보다 14년 후에 죽은 그의 후배 멜랑히톤이나 우리가 볼 때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새 생명현상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누가복음 20장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도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제도 하에서 일곱 형제와 혼인한 여자는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천국에는 결혼이나 가정도 없다고 하시면서 부활생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천국에는 다시 죽는 일이 없고 천사와 같으며 부활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오늘날 부활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한국에는 민중신학자들이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이나 사랑을 제자들이 깨닫게 된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도 문제지만 부활생명이나 천국을 이 세상적 개념과 수준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보수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 부활을 죽어서 우주 어느 곳에 복지시설이 완벽한 천당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본 천국”이니 뭐니 하면서 천국을 복지 시설이 완벽한 곳으로 묘사하고 기대합니다. 명망 있는 대형교회 목사가 이런 책을 교우들에게 추천하여 그 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오해를 출애굽기 3:6절을 인용하여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죽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지금 그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 우리들도 받아들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다같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마 22:32, 막 12:27, 눅 20:38)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에다 한 마디를 덧붙여“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가 이 말씀을 덧붙인 것은 부활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키워드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당연히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는 지금 이 세상에서 생물학적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다가 죽은 사람 모두를 가리켜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 호흡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생물학적 호흡을 해야만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수준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물학적 생명현상 너머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물학적 생명현상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생명에 대해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물학적 생명만을 생각하는 현상적 차원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얻은 새 생명은 생물학적 호흡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삽니다. 이 차원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뿐 아니라 무덤 속에서 몸이 썩어 모든 질료가 해체된 사람들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 차원의 생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경계가 너무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경계를 해체하셨습니다. 새 생명현상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새 생명현상 즉 부활생명에 대해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활생명에 대해 천국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히 설명하려는 것은 이단들이 가지는 호기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생명현상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공부하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 때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생명이 그렇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많은 활동도 살아 있는 생명현상이지만 그런 것을 넘어 숨 쉬지 않는 생명형식이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생명형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실증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 있고 심지어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 생명현상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하고 싶은 것 하는 것으로만 작동하면 죽은 것입니다. 부활생명이나 하나님 나라의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향하여 작동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 눅 20:38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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